[칼럼]
당신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취향이 있나요? <소공녀>
2011년, 경향신문의 특별취재팀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사는 청년층을 ‘삼포세대’로 명명했다. 이 용어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고, 곧 포기 항목을 늘린 ‘오포세대’, ‘칠포세대’ 등의 단어까지 유행시켰다. ‘삼포세대’에서 ‘오포세대’로 넘어갈 때 동시에 추가된 것이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1/5이 모여 사는 서울시의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은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요소 중 하나인 ‘집’(住), 즉 안정적으로 살아갈 울타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메뚜기처럼 남의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하는 처지의 설움이 인간관계 포기, 즉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능을 죽이는 것과 유사한 성격 혹은 비중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후 포기 항목에는 꿈, 희망, 건강, 외모관리 등이 추가되더니, 이제 다 헤아릴 수조차 없어 N(natural number)이라는 알파벳으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더러는 이 안에 ‘삶’까지 포함시키며 비관적인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미세먼지가 대기를 뒤덮지 않아도 우리 청춘들의 가슴은 충분히 답답하다. ? 지난 수년간 한국 독립영화는 이 절망적인 시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해왔다. <10분>(이용승),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안국진), <족구왕>(우문기) 등이 2014년과 2015년 사이에 쏟아져 나왔고, <스틸 플라워>(박석영)와 <초행>(김대환) 등이 뒤를 이어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얻었다. 지난 3월 22일 개봉한 <소공녀>(감독 전고운)는 이런 작품들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선한 캐릭터와 화법으로 눈길을 끈다. ? ? 대학을 중퇴하고 가사도우미의 길을 택한 ‘미소’(이솜)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다. 일당도 적고 일도 불규칙한데다 한 겨울의 반지하 월세방은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눌 수도 없을 만큼 춥고 낡았다. 궁핍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늘 우울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 만족감의 중심에는 착한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이 있고, 소비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위스키와 담배가 있다. 이 세 가지는 N포세대인 미소가 감히 포기하지 않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자 그녀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 어느 겨울 날, 담배값과 월세가 한꺼번에 오르자 미소는 응당 집을 포기하고 나와 대학시절 함께 밴드 활동을 하던 멤버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그 때부터 영화는 미소가 스스로 ‘여행’이라고 부르는 떠돌이 생활을 통해 다섯 가지 삶의 양태를 보여준다. 같은 대학을 나왔고 함께 밴드 활동을 했지만, 몇 년이 흐른 후 멤버들은 너무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가고 있다. 미소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에게 당신은 어떤 캐릭터와 가장 가깝냐고 물어오는데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무례하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 ? 미소가 처음 찾아간 곳은 베이스를 치던 동기, ‘문영’이 일하는 대기업 빌딩이다. 점심시간에 손수 링겔을 꽂아가며 일할 정도로 성실한 직장인이 된 문영은 보증금을 모아 월세가 싼 곳을 얻어보겠다는 미소에게 ‘바람 든 것 같다’는 말로 응수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예민해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잘 수 없다는 그녀에게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서 더 좋은 직장에 가겠다는 목표가 현재 가장 중요해 보인다. 대학 합격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해온 세대들이라면 십분 이해할 만한 인물이다. ? 결혼해서 살림을 하고 있는 ‘현정’은 미소를 뜨겁게 환영하지만, 시댁에 얹혀사는 처지로 손님을 들이는데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학창시절 키보드도 잘 치고 곡도 잘 쓰고 잘 놀고 잘 웃던 현정은 이제 시댁에서 친정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남편과도, 시부모님과도 잘 소통하지 못하고 겉도는 그녀의 형편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미소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 해낸 이들에게도 그 자체가 위안이 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또 한 명의 인물이 후배, ‘대용’이다. 결혼한 지 8개월도 안 돼 이혼남이 된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사코 대화를 거부하던 그가 드디어 미소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들려주는 아파트 이야기는 재미있는 대사들로 가득 한 이 영화 안에서도 압권이다. 그는 결혼할 때 아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빚을 내서 산 아파트가 이제 20년 동안 꼼짝 없이 대용을 묶어두는 감옥으로 전락해버렸음을 고백한다. 그나마도 술병과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감옥이다. 바로 앞 신(scene)에서 미소가 한솔에게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이러한 대용과의 대화 중에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타인들이 으레 하고 있는 행위들을 미소는 그녀의 기준에 따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타인과 구분시키고 자존감을 지킨다. ? 네 번째로 찾아간 ‘록이’의 집에서, 미소는 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는 록이에게 미소는 집은 없지만 자신에게도 생각과 취향이 있다고 잘라 말한다. 안정감을 느끼기 위한 타협 같은 것은 그녀의 사전에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소의 삶의 태도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재워준 ‘정미’에 의해 무참히 공격당하고 만다. 자기 취향이 아님에도 시부모님이 준 큰 집에서 아이와 남편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는 정미는 록이가 언급했던 안정감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위스키와 담배도 끊지 않으면서 남의 집 신세를 지는 것은 ‘염치’가 없고, ‘한심’하다며 미소를 비난한다. 정미가 후배를 쫓아내며 마지막으로 내미는 것은 따뜻한 말 한 마디 대신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다. ? 등록금이 비싸 대학을 중퇴했던 과거도, 가사도우미라는 직업도, 집이 없다는 사실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꿋꿋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미소는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멤버들의 집을 떠날 때마다 그녀가 보여주는 개념 있는 행동들, 예의, 따뜻함과 배려는 그녀를 그저 멋진 N포세대의 한 사람이 아니라 성녀(聖女) 같은 존재로 승화시킨다. 그녀는 청소와 요리, 엽서 등을 통해 멤버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을 해고하기 직전인 술집 아가씨를 오히려 위로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미화는 다분히 의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장례식장에 밴드 멤버들이 모여 미소를 회상하는 장면은 마치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 안에서처럼 가공된 판타지적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타인들의 기억 속에 웃는 게 예쁘고, 밥을 잘하고, 생각만 해도 미소가 나고, 스타일이 멋있었던 미소는 집에 이어 인간관계도 포기해야 했지만 마지막까지 위스키를 즐긴다. 친구들도, 고용주도, 남자친구도 떠나보낸 그녀가 위스키를 마시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연출된 장면 중 하나다. 누군가에게는 한심해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허세로 보일지 몰라도 미소는 그렇게 우아한 자신의 취향을 끝까지 고집함으로써 팍팍한 사회를, 고된 인생살이를 버텨낸다. ? ‘소공녀’의 미덕 중 하나는 N포세대, 특히 여성 캐릭터를 앞세운 영화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사건이나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고운 감독은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행, 강간, 폭언과 욕설 등을 배제하고, 자극적인 영상 하나 없이 동시대 청춘들의 씁쓸한 자화상을 그리는데 성공했다. 어두운 시대를 끔찍한 사건들로 설명하기보다 주변에 있음직한 캐릭터를 유심히 관찰하는 방식으로 조명해낸 점이 훌륭하다. 주인공과 달리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기 위해 전전긍긍 하는 인물들까지도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은 데서 신인감독답지 않은 여유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빚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누가 뭐래도 포기할 수 없는 취향 하나가 간절해지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 글. 영화평론가_윤성은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