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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당 인생', 행복할 시간이 없어요 / 영화 <미안해요, 리키>

[칼럼] '건당 인생', 행복할 시간이 없어요 / 영화 <미안해요,...

이름만 떠올려도 존경심이 우러나는 영화감독 몇 명이 있다. 먼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덴마크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프랑스의 로베르 브레송이다. 다들 많아야 10편 남짓한 작품을 남겼어도 세계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릴 만한 수준이고, 종교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성스럽게 이어간 연출은 감탄을 넘어 숙연케 한다. 현역 감독 중에서 찾으라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생각나지만 영국의 켄 로치부터 꼽겠다. ‘블루컬러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일러주듯 언제나 세상 낮은 자리에서 거친 손들을 잡고 투쟁하는 모습엔 송구스런 느낌마저 든다. 50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나눌수록 풍요해지는 세상을 소망했으나 불평등과 착취의 그림자는 아직껏 걷히질 않는다. 그래도 로치 감독은 흔들리거나 물러서지 않으며 연대가 이뤄내는 놀라운 힘을 믿는다. 각각 스페인 내전과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추적한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제하면 <하층민들>과 <레이닝 스톤>, <내 이름은 조>와 <빵과 장미>, <달콤한 열여섯>과 <자유로운 세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 대다수 작품이 노동자와 실직자, 소외 계층의 고달픈 일상을 다룬다. 노동과 복지, 사회 변혁의 가치를 스스로 실천한 83살 감독의 생애가 궁금하다면 다큐멘터리 <켄 로치의 삶과 영화>를 보길 바란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촬영 현장에서. 켄 로치 감독 ?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는 삶 또는 내 일이 없는 내일. 켄 로치 영화에 담긴 초조하고 막막한 풍경이다. 그래서 부유층이나 권력가, 정치인은 끼어들 틈이 없으며 스타급 배우도 부름을 받기 어렵다.<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각본을 집필한 폴 래버티는, 로치 감독이 15번을 함께 작업할 정도로 신뢰하는 파트너다. 경기 침체에 빠진 영국 중소 도시 뉴캐슬. 깜깜한 화면을 뚫고 나오는 첫 대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처럼 쓰이니까. “고용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거고 우린 ‘승선’이라 부른다. 계약 같은 건 없고 목표 실적도 없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니 전사만 살아남는다.” 프랜차이즈 택배업체의 물류창고 관리인이 면접을 보러 온 사내에게 직업을 설명한다. 설탕을 바른 독약인가. 개똥철학을 얹은 유혹인가.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판에 무얼 따지겠나. 무엇보다 몸뚱이 하나로 온갖 궂은일을 견뎌낸 40대 가장에게 자영업은 꿈이었다. 아무튼 이 남자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 기사로 들어가 희망차게 시동을 건다. 필수품은 빈 페트병과 심장 박동처럼 품어야할 개인정보 단말기. 리키의 아들은 공부에 넌더리 난 고교생이고 막내딸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 온화하고 이해심 많은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요양보호사로 치매 노인들을 정성껏 돌본다. ? 영국인의 전투에 가까운 축구 사랑으로 웃음을 준 영화는 ‘하청 사회’ 의 복판을 파고든다. 하루 14시간, 일주일에 6일을 일하는 리키. 주문품을 전달할 때마다 들어야하는 폭언이나 개에 물어뜯기는 건 이골이 났다. 문제는 환경과 시스템이다. 업소 안에서는 허리를 펼 틈이 없으며 밖에 나가면 끼니를 때울 시간도 모자란다. 2분만 머뭇거려도 정보단말기가 귀신처럼 경고음을 날린다. 쉬고 싶으면 벌금과 대체인력비를 내야 한다. 관리인은 “너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뼈 빠지게 온몸을 굴리는데도 노동자가 아니라니. 일하는 기계와 소비하는 고객 사이에 낀 유령인가. 책임을 지지 않는 고용에 개인사업자라는 허울. 농락하고 벗겨먹는 수법은 야바위꾼이 울고 갈 지경이다. 켄 로치 감독은 디지털화한 임시직, 다시 말해 기업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시로 고용하는 ‘긱 경제(Gig Economy)’도 비판대에 올린다. 악조건에 시달리기는 아내 애비도 마찬가지다. “제로아워 계약이라서 건당 받아요.”라는 대사대로 요양보호사 애비는 정확하겐 ‘제로아워(Zero Hour)’ 계약 노동자다. 늦은 밤에도 불려 나가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24시간 대기조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트타임보다 못한 근로 조건 때문에 노예 계약으로 통한다. 인간을 노예로 떨어뜨리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체제. 리키와 애비의 삶은 주문에 맞춰진 ‘건당 인생’이다. 리키가 바라는 건 단순하고 소박하다. 빚을 다 갚고 셋방살이를 끝낸 뒤 저녁 식탁에 가족과 함께 앉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을 위한 노동이 오히려 가정을 흔들어 균열을 일으킨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우습고 얄밉고 아프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직업이 있단다.” “안 그러면 결국 아빠처럼 되지?” 카메라는 노동자 부부에게만 머물지 많고 속을 썩이는 아들에게 자주 눈길을 돌린다. 일찌감치 생존술을 터득한 청소년을 통해 무능하고 나약한 기성세대를 진단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니 무자식이 상팔자라거나 싹수가 노란 녀석이라 꾸짖으면 곤란하다. 아들에겐 공부보다 더 좋아하고 잘하는 게 있지만 아버지는 몹쓸 장난으로 여긴다. 딱 한 번 화목하게 느껴질 뿐 가족이 모일 때면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은 리키 집안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다. 골칫덩어리 아들이 다양하게 사고를 치자 리키는 구걸하듯 휴가를 신청하지만 관리인은 콧방귀도 안 뀐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의 충고와 비유가 전혀 터무니없는 게 아니어서 더 난감하고 울화가 치민다. 켄 로치 영화답게 이번에도 리키 가족을 포함한 모든 배역을 비전문 배우들이 맡았다. 처음 출연하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 연기가 아니라 삶을 산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 “소비자들은 네가 졸다 버스를 처박아도 가격과 배송, 네 손의 물건 외에 관심도 없어.” 문화도 관습도 다르지만 결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질 않는다. 장면마다 지금 이곳 상황이 겹쳐진다는 말이다. 국내 배달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절반가량이 30대 미만이다. 경쟁은커녕 자기 존재를 드러낼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이제는 라이더로 곡예하듯 시내를 질주한다. 최근 3년간 열여덟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의 배달원 32명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신속성은 배달의 생명이 아니라 흉기였다. 과속과 과로로 하루를 여닫는 택배 기사를 위한 사회안전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이들에게 적용될 산업재해 보상 법안을 마지막까지 기를 쓰고 막은 건 정치인들이지만 그 뒤엔 재벌 대기업의 보험회사가 있었다. 영국의 자영업자 리키도 기업을 배 불리기 위해 부품처럼 쓰이다?폐건전지처럼 버려질 신세이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다 마침내 폭발하는 분노. 인간다운 노동이 가능한 세상은 아직도 멀기만 한가. 마지막 장면엔 한 마디도 달지 못하겠다. 속울음을 삼키는 관객이 많을 듯싶다. 무섭도록 차갑고 정직한 연출이다. 오늘도 지친 몸과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이 땅의 ‘리키’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거창하게 행복 추구권을 들먹이며 생색낼 필요는 없다. 배송을 재촉하지 않는 태도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조직폭력배 때려잡기에 바쁘겠지만 한국영화가 <미안해요, 리키>에 담긴 시대인식과 인간옹호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83살 ‘영화 청년’에게 깊은 경의와 감사를!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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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열정, 의지의 코드로 / 영화 <와일드 로즈>

[칼럼] 가족과 열정, 의지의 코드로 / 영화 <와일드 로즈>

타이틀 배경은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도소. 벤조와 기타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한 여성이 부르는 노랫말이 예사롭지 않다. “...내 손을 잡아 줘/ 이 병든 땅에서 꺼내줘/ 나는 지쳤고 허약하고 아파요, 나는 도둑질했고 죄를 졌어/ 아, 내 영혼은 깨끗하지 못해/ 컨트리 걸, 계속 견디게 해줘.” 시원하게 올라가는 목소리로 호소하는 사람은 아일랜드 출신 제시 버클리로, 주인공 로즈 역을 맡았으며 10곡을 직접 부른다. 톰 하퍼 감독의 <와일드 로즈 (Wild Rose)>는 단순히 음악 영화로 묶기엔 폭이 꽤 넓다. 생각의 줄기랄까. 뿌리와 잎을 연결하는 기둥이 단단하다. 마약을 운반한 죄로 1년을 복역하고 나가는 로즈의 오른쪽 팔목엔 ‘3가지 화음과 진실(three chords and the truth)’이라는 뜻 모를 문신이 새겨져 있다. “넌 제2의 돌리 파튼이 될 거야.” 감방 친구들의 요란한 작별 인사에 로즈는 온몸으로 맞장구를 친다. 돌리 파튼의 이력을 낱낱이 늘어놓기엔 숨이 벅찰 지경이니 한 줄로 줄이겠다. 그래미상을 9번 받은 가수이자 3천곡 넘게 발표한 작곡가이며 <나인 투 화이브>(1982)와 <철목련>(1989)에서 개성 강한 캐릭터로 관객을 사로잡은 배우다. 출소하자마자 건달 사내와 야릇한 데이트를 즐긴 로즈는 술집에선 이유 있는 난동을 피운다. 제목에서 묻어나오는 거칠되 질긴 생명력. ? ? 철없는 10대 시절에 두 아이를 낳은 된 로즈.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도 5살짜리 아들이 반길 뿐 8살 난 딸은 입을 열지 않으며 어머니 마리온(줄리 월터스)도 시큰둥하게 맞이한다. 로즈는 동네 ‘그랜드 올 오프리’(이 이름의 유래는 후반에 가서야 밝혀진다) 바에서 10년 동안 노래를 불렀어도 전자 발찌를 찬 전과자에게 마이크를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컨트리 음악에 미쳐 미국행을 꿈꾸는 딸에게 어머니는 주제를 알고 애들이나 잘 키우라며 핀잔을 준다. 대저택 가사도우로 들어간 로즈가 흥얼거리며 청소하는 모습을 판타지로 꾸미는 수법이 좋다. 공연장 카메라처럼 다양한 앵글로 5인조 밴드의 연주를 담아내는데, 하모니카와 피들을 더하면 전형적인 컨트리 악단 모습이다. 성조기로 만든 티셔츠가 우스꽝스럽지만, 기회란 불현듯 찾아오니 늘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법. 로즈의 젊음과 재능이 부럽고 아까운 집 주인 수잔나(소피 오코네도)는 로즈를 런던의 컨트리 고수에게 보낸다.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라는 너스레에 “목소리는 타고 났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해요.” 라는 조언. 직접 곡을 쓰라는 충고에 난감해진 로즈는 수잔나가 다시 준비한 디딤돌을 밟으려는데 뭔가 위태롭다. ? 로즈의 꿈은 미국 내슈빌에 닿아 있다. 팔에 새긴 문신도 컨트리 음악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자 다짐이다. 컨트리를 ‘컨트리앤웨스턴’으로 부르는 걸 로즈가 혐오하는 까닭은, 지역을 한정하거나 마초적 야성에 대한 반감 정도로 추측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의뭉한 강아지 스누피를 창조한 찰스 슐츠의 네 칸 만화 <피넛츠> 한 대목이 떠오른다. “베토벤은 내슈빌에선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짝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슈로더가 눈길 한번 주지 않자 말괄량이 루시가 약을 올리는 말인데, 내슈빌이 컨트리 음악의 성지라는 걸 새삼 확인케 한다. 조니 캐시를 비롯해 행크 윌리엄스와 마티 로빈스 등 숱한 컨트리 스타를 배출한 곳을 찾아가는 로즈에게 길은 열릴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비스트>와 올해 최고의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의 소방관 아내로 얼굴을 알린 제시 버클리는 실제로 BBC 오디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경력이 있어 연기는 물론 빼어난 가창력으로 존재감을 발산한다. 공포 영화 <우먼 인 블랙 : 죽음의 천사>에서 얼토당토않은 물귀신 작전으로 망신당한 톰 하퍼의 이번 연출은 그야말로 심기일전. 좋아하는 것보다 잘 할 수 있는 걸 선택한 결과이다.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다 아이들과 약속을 까먹은 로즈를 어머니가 매섭게 꾸짖는다. 기본에 충실하고 책임을 가져야 하는 삶. 이 작품의 서브플롯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동냥젖 먹이듯 아이들을 맡기는 신세, 뒤통수에 꽂히는 비웃음, 이상과 현실 사이의 철벽. 물집 잡힌 발로 뚫고 나가야할 길. 번역 솜씨가 돋보이는 노랫말 몇 대목을 살펴보자. “무릎 다치려나 겁내지마 / 전부 틀려도 괜찮아. 약해야 강해질 수 있어/ 너의 노래를 부르고 네가 꿈을 꾸는 삶을 살아/ 꿈꾸는 사람이 사라지는 날까지. ()” “우리는 슬픔을 붙들 손이 있고 아픔을 삭일 눈물이 있어/ 난 아무도 모르게 태어났고 빗물을 맞으며 태어났지/ 골짜기 너머로 날아가 문을 열어젖힐 거야/ 그곳에 다다르면 난 나의 길을 알아볼 거야. ()” “나는 엄마 이름을 물려받은 늙은이라오 / 우리 영감은 늙어버린 아이에 지나지 않지/ 꿈과 욕망이 천둥과 번개라면/ 이 집은 이미 타버린 지 오랠 거요.()” “ 다정한 얘기들과 정다운 수다가 쌓여 없으면 살 수 없는 뭔가를 꽃 피우지/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은 안으로부터 생겨 밖으로 나가는 거야/ 온힘을 다해 지금 확실히 말해 둘게 / 우리 집엔 평화가 가득할 거야, 믿음이 가득할 거야.()” 구절마다 험난한 여정에 지친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매몰찼던 마리온도 딸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책임감을 가지란 거였지. 희망을 뺏으려는 건 아니었어.” ? 성공 스토리와 스타 탄생에 골몰한 탓일까. 노래는 새롭지만 서사는 낡은 음악 영화들이 적잖게 나오니 말이다. 신나는 연주에 찰과상 수준의 통증을 얹어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공식도 여전하다. <와일드 로즈>는 결과보다는 과정과 선택에 주목한다. 덩굴에 감기고 가시에 찔려 깨닫는 인생살이. 어떤 어려움도 견디겠다는 의지. 그렇다고 ‘주의설(voluntarism)’을 신봉하는 철학자처럼 의지를 ‘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의지란 삶을 끌어갈 핵심 동력이라는 것은 확실하니까. 지극히 현실적인데다 보편성을 갖추고 흥겹되 묵직한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음악을 앞세운 가족 영화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도식적인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시답잖게 가르치려들거나 뻔히 보이는 결말로 이끌진 않는다. 수습이 덜된 상태로 닫는다거나 생략이 지나치다며 불만을 터뜨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온갖 에피소드를 늘어놓고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면 깊이는 얕고 무게감은 떨어졌을 터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여백을 채우는 재미. 한 순간의 판단은 평생의 경험과 맞먹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했던가. 엔딩에 폭죽처럼 터지는 노래 는 성찰과 기쁨의 시이자 고백으로 넋을 흔든다. 컨트리 음악이 코드 3개로 진실을 담았다면, <와일드 로즈>는 가족과 열정과 의지라는 코드로 인생을 노래한다. 화음도 아름답고 멀리 퍼지는.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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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꿈을 찍고, 시대는 악몽을 꾸고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칼럼] 영화는 꿈을 찍고, 시대는 악몽을 꾸고 / 영화 <원스 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유년의 추억에 젖는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극장에 혼자 갈 수 있게 된 뒤에는 주말마다 가서 봤고요. 안 본 영화가 없을 때는 본 걸 또 봤습니다.” 이소룡 골수팬이자 잡식성 영화광 어머니는 주제나 내용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어린 아들을 극장에 데려갔다. 아홉 살 난 타란티노가 엄마 손을 잡고 잇따라 구경한 영화는 <와일드 번치>와 <서바이벌 게임(Deliverance)>. 멕시코 군인들 수백 명이 피를 토하며 춤추듯 쓰러져 죽어가는 총격전과 수몰 지구에서 래프팅을 즐기려는 네 사람이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쫓기며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보며 꼬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학교를 중퇴하고 성인영화관 안내원을 거쳐 비디오 가게 종업원이 된 타란티노는 5년 동안 영화란 영화는 죄다 짓찧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걸어 다니는 영화백과사전으로 통한 그가 5주일 만에 완성한 <저수지의 개들>에 담긴 반칙과 교란의 서사도 놀랍지만, 더욱 교묘하게 구성한 두 번째 작품 <펄프 픽션>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이 주어졌으니 그야말로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헤모글로빈의 시인’ ‘폭력의 피카소’라는 별명대로 스크린엔 핏물이 고이고 튀고 흐른다. 칼로 상대방의 귀를 잘라내는 건 보통이고 머리 가죽을 벗겨내기도 했으니까. “어머니는 제 영화 속 고문 장면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 어머니에 그 아들.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프로모션 현장 ? 1969년 8월 9일. 사이비 교주이자 악명 높은 살인범 찰스 맨슨을 열렬히 추종하는 ‘맨슨 패밀리’ 남녀 4명이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영화감독 집에 쳐들어가 임신 8개월 여성을 포함해 일곱 명을 죽였다. 총기 난사에 난도질 등 악당들의 살해 수법은 입에 올리기도 끔찍하다. 세계 범죄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는 잔학무도한 살인극이 바로 ‘샤론 테이트 사건’이다. 범행의 표적은 이전에 살던 음반 제작자였는데, 살인마들은 그가 이사 간 사실을 몰랐으며 애꿎게 죽은 사람들이 누군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찰스 맨슨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바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83살에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영화 제목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이 학살극과 사회 분위기를 모르고 감상하면 상영시간 161분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요동치는 결말부에 당혹스러울 수 있다. 최근 몇 사이에 제작된 <울브스 앳 더 도어>와 <헌팅 오브 힐하우스>는 맨슨 집단의 흉포성을 재현했지만, 만듦새가 워낙 조악하니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타란티노 감독의 9번째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는 희생자들의 실명까지 올리며 같은 소재를 다룬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전문가이자 피 맛 감별사가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건 처음이다. 카메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딱 6개월 전 할리우드로 돌아간다. ? 서부극 시리즈로 브라운관을 장악했던 배우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신인들에게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 스턴트맨이자 매니저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만 오랜 우정을 지킬 뿐이다. 릭은 주인공 들러리에 머무는 악역을 따내지만 그마저도 잦은 음주 탓에 대사를 까먹기 일쑤이다. 릭과 불안정한 동거를 이어가는 클리프는 거칠되 쾌활하고 때론 과묵하다. 로마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어 목돈을 만졌어도 궁상을 못 벗어난 릭은 옆집 부부가 더 없이 부럽다. 남편은 첫 작품 <물속의 칼>로 천재 소리를 들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고 아내는 떠오르는 배우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다. 이소룡에게 무술 지도를 받으며 출연한 <렉킹 크류>의 자기 모습을 테이트는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유작으로 남을 것을 눈치 챈 관객이라면 꺼림칙하고 조바심이 날 듯싶다. 그런데 감독은 두 시간이 넘도록 시치미를 떼고 딴청을 부린다. 피비린내를 풍기기는커녕 칼을 갈거나 총을 손질할 생각이 없다. 엄숙한 상황에서 짓궂은 유머를 끌어내더니 머릿속 필름 창고를 열어젖힌다. 스티브 맥퀸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대탈주>에 난데없이 릭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로미오와 줄리엣>과 <자이언트>, <올리버>와 <화니걸> 같은 고전 영화 50여 편의 명장면과 음악을 집어넣거나 예고편과 광고로 보여주고 포스터를 붙이는 식으로?다양하게 오마주한다. 밉지 않은 능청이자 창고 대방출. 1960년대 후반, 할리우드는 꿈을 찍고 시대는 악몽을 꾸었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잇따른 피살, 격렬한 반전 시위와 히피들의 반사회 행동으로 뒤숭숭한 나날이었다. 반면에 대중문화는 비틀즈가 상륙하고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처음 열렸으며 아메리칸뉴시네마가 싹을 틔우는 등 황금기를 누렸다. 요즘처럼 컴퓨터그래픽에 목을 맬 일이 없었으니 배우들과 제작진은 열정으로 똘똘 뭉쳤다. 그렇게 낭만 가득한 할리우드와 혼란스런 시대상이 스크린에 되살아난다. 곳곳에 숨겨진 상징과 암시를 찾는 일도 어지럽지만 즐겁다. 예를 들면, 클리프를 아내 살인범으로 의심하는 대목에 보트를 얘기하고 나탈리라는 이름을 부른다. 이 장면은, 남편 로버트 와그너 감독과 요트를 타다 익사한 배우 나탈리 우드 죽음에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사인은 31년 만에 사고사에서 원인 불명으로 바뀌었다. 혜성 같이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지고 더러는 제 그림자만 밟아야 하는 영화판의 경쟁과 애환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여덟 살짜리 근엄한 배우의 가르침과 위로에 감격한 릭이 몸 둘 바를 모르는 대목은 우습고 쓸쓸하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인종 차별과 비하도 필요하다는 건가. 폴란드 출신 감독 폴란스키의 속이 뒤집힐 대사가 들릴 뿐더러 이소룡이 나오는 장면은 유족과 팬들이 분통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도 그럴 것이 타란티노는 <킬빌>에서 우마 서먼에게 이소룡의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히며 존경심을 내비치지 않았던가. ? 타란티노는 물론 액션의 장인 샘 페킨파와 스즈키 세이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작품을 거론할 땐 으레 ‘폭력 미학 ’ ‘살인 미학’ 을 내세운다. ‘문화’라는 단어만큼 남발하는 게 ‘미학’이다. 아무 데나 갖다 붙여도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인가. ‘불륜 미학’이 유행한 적이 있으니 ‘강간 미학’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잔혹성을 겨루듯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짓이기고 쳐죽이는 행위에 무슨 품격과 아름다움, 철학이 있겠는가. 묘사하는 스타일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할 만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타란티노 액션은 한 마디로 ‘폭력을 부수는 폭력’이다. 결말부에 이르면 감독은 숨겨둔 응징의 기술을 섬뜩하고 현란하게 과시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앞에서 의미 없어 보이던 삽화들이 클라이맥스의 폭발을 겨냥한 복선이며 뇌관이었다는 사실이다. 트레몰로 주법의 기타 연주곡을 비롯해 딥 퍼플의 <허쉬>와 박스 탑스의 <츄 츄 트레인>, 사이먼&가펑클의 <미세스 로빈슨> 선율이 세월을 되돌린다. <초원의 빛>에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읊던 나탈리 우드의 마음이었을까. 빛이여, 영광이여. 옛날 옛적 할리우드 키드다운 애틋하고 아련한 엔딩이다. 10편만 찍고 은퇴하겠다고 공언해온 타란티노가 남길 고별사가 궁금하다. 영화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했다면 그의 충고를 새겨들을 일이다. “영화감독이 되려면 영화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저처럼 영화를 유별나게 사랑하고, 열성껏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틀림없이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저는 비록 중학교를 그만 두었지만 학구열이 높아요. 평생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죽는 날이 곧 졸업하는 날이겠죠.”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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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우리 독립영화 / 영화 <우리집>, <벌새>

[칼럼] 날아라, 우리 독립영화 / 영화 <우리집>, <벌새>

막바지 무더위를 날려버릴 기세로 한국 영화 두 편이 날아오른다. 자극과 충동, 과장이라는 장비로 진지를 구축한 극장가. 덩치를 키울대로 키운 블록버스터에 눌린 작은 영화들이 내지르는 비명. 동정이나 자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유행에 현혹되지 말고 독창성을 기를 일이다. 트렌드가 아니라 브랜드. 규모는 작아도 열정과 패기로 자기 인장을 또렷이 찍었기에 이달엔 독립영화 두 편을 묶었다. 사려 깊고 울림이 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은, 두 번째 연출작 <우리집>을 지은 윤가은과 <벌새>의 날갯짓으로 첫 선을 보인 김보라 감독이다. 여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우선 두 감독은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 단편 영화를 통해 연출의 기초를 다졌고 장편에서는 식구, 다시 말해 밥상공동체로서 가족을 앞세우며 따갑고도 나른한 여름 풍경을 곁들인다.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미성년자를 중심으로 그들 가정의 형편과 갈등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방식에선 내밀한 일기나 기록으로 읽힌다. ?<우리집> 스틸컷 ? <우리집>의 남편과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다투고, 이들의 실속 없는 싸움질에 넌더리 난 중학생 아들은 연애에 몰두한다. 화목한 가정이 그리운 12살 막내딸 하나(김나연)는 가족 여행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가로막힌다. 우연찮게 유미(김시아)와 유진 자매의 언니 노릇을 하게 된 하나는 동생들이 안쓰럽다. 생고아로 살아가는 데다 연례행사처럼 셋집을 옮겨 다녔으며 또다시 집을 비워줘야 한다. 하나는 부모가 갈라설까 겁이 나고 유미, 유진은 낯선 곳으로 가는 게 싫다. 포클레인 갈퀴손이 찍어내릴 듯 위태로운 가정, 공간. 부모가 목청껏 싸울 때 자식들은 이불 속에서 소리 죽여 운다. 말이 좋아 언어폭력이지 찌르고 베는 흉기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도 부부가 악을 쓰고 내뱉은 몇 마디는 공포영화의 난도질에 버금가는 수준이어서 옮기기가 거북하다. 각본에서 절제력은 리얼리티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철들자마자 터득한 동병상련인가. 무책임한 어른들에 맞선 연대감인가. 우리집을 사수하려는 세 아이의 지략이 기발하고 순진하며 우스꽝스럽다. ? ?<우리집> 스틸컷 ? 그다지 밝지 않은 이야기로 큰 틀을 짰어도, 판타지를 빙자한 뜬구름 잡기와 판에 박힌 캐릭터며 섣부른 훈계로 어린이 영화를 망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고단한 현실 복판에 아이들을 세운 카메라는 그늘에 빛을 쏘듯 따라잡길 반복한다. 성인들 마음에도 봉숭아물을 들여준 데뷔작 <우리들>에 이어 유년의 천진하되 토라지는 감성을 파스텔화로 옮기는 연출이 매끄럽다. 공중전화 부스 장면은 그 나이 때만 꾸밀 수 있는 깨알 같은 재미를 주고, 해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김나연과 김시아는 팽팽하게 부딪히며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인내하고 폭발하는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귀엽고도 놀랍다. 몇 군데서 작위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완성도에 손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다. 지친 만큼 무뎌진 어른들을 성찰과 반성으로 이끄는 힘도 있다. 그런데 윤가은이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동업자의 평가는 당혹스럽다. 과찬은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쨌거나 ‘아이들의 감독’ 윤가은은 소중하고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린다. ? ?<벌새> 스틸컷 제목부터 조류도감을 들추게 한 <벌새>는 첫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불안함과 막막함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만화가를 꿈꾸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 집안은 남자와 여자의 삶이 확연히 나뉜다. 강요와 폭력 아니면 순종과 일탈. 가부장제를 누리거나 그 사슬에 묶인 것이다. 학벌주의로 도배질한 교실은 신병훈련소나 포로수용소를 닮아간다. 학생들은 날라리를 색출하기 위해 친구를 고발해야 하고, “노래방 말고 서울대 가자”를 후렴처럼 외친다. 압제와 훈련에 지친 은희가 비행소녀 흉내를 내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을 쓰는 않는다. 가족은 동거인으로 머물 뿐이고, 친구들은 당기고 떠밀기를 반복하며 상처를 덧낸다. 삭막한 도시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소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한문 교사 김영지(김새벽). 14세기 <명심보감> 한 대목을 모던하게 풀어내더니 오는 주먹은 받아치라고 일러준다. “가만 있으라”가 아닌 “가만 있지 마”이다. 선생은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치고 제자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적역을 맡은 박지후는 샛별 탄생을 예고하기에 충분하고, 서사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책임진 김새벽은 발군의 연기를 뽐낸다. <벌새> 스틸컷 ? 우울한 개인사와 맞닿은 시대의 비극. 트램펄린에서 튀어 오르는 소녀들과 <칵테일 사랑>의 레게 리듬처럼 1994년 한국 사회는 밝고 경쾌했을까. 김호철의 노동가요 <잘린 손가락>이 온몸으로 앓으며 증언한다. 신기루, 가망 없는 희망으로 날밤을 지새웠다고. 단절과 마모, 균열 그리고 붕괴. 현실인지 악몽을 꾼 것인지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추깃물처럼 섬뜩하고 숨통을 죄는 눅진한 공기. 소녀는, 우리는 그렇게 버텨냈구나. 기적처럼 살아온 세월이었구나. 뼈저린 감격이라는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따금 몽롱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봐야할 장면이 많다. 집구석 폭군들을 정리하는 감독의 태도는 단호하고 방식은 섬세하다. 상황과 흐름, 분위기에서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에드워드 양 감독을 추억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군더더기라기보다 곁가지로 느껴지는 몇 장면은 편집에 고심한 흔적으로 비친다. 처음에 완성한 3시간 30분짜리 버전을 감독판으로 만나고 싶다. 거대한 프레스코벽화를 새기려는 김보라 감독의 야심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다.” 는 선생에게 제자가 묻는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아무렴 빛나고말고. 일찍이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고 낙관했으니까. 슬픔을 거름 삼아 피워낼 아름답고 빛나는 삶과 세상.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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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특별해요, 이겨내세요 / 영화 <돈 워리>

[칼럼] 당신은 특별해요, 이겨내세요 / 영화 <돈 워리>

영화 <돈 워리(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가 자신을 소개한다. “난 존 캘러핸이고 생모가 누군지 몰라요.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이에요.” 다양한 불행이라니, 세상 모든 고난을 떠맡은 듯한 처연함이 묻어나온다.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 포틀랜드에서 활동한 카투니스트 존 캘러핸 (1951~2010). 풍자만화 그리기가 본업이지만 음반을 낼 만큼 작곡과 노래에도 재능이 많았다. 영화 타이틀은 그가 펴낸 회고록과 카툰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캘러핸 작품은 얼핏 거칠고 잡스러워 보이지만 냉소와 해학으로 찌르고 비트는 유머 감각은 탁월했다. 그의 카툰이 신문과 잡지에 오를 때마다 독자들 평가는 열광 아니면 비난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국내에는 회고록이며 만화 모음집 등 캘러핸에 관한 서적은 출간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2007)과 몇몇 카툰은 유튜브에서 구경할 수는 있으니 다행스럽다. 구성에서 완성까지 <돈 워리>에 20여 년 세월을 쏟아부은 사람은 미국의 구스 반 산트 감독이다. ? ? 남들이 연습할 때 구스 반 산트는 실험한다. 첫 작품 <말라 노체>로 독립영화의 지평을 넓혔고 <드럭스토어 카우보이>와 <굿 윌 헌팅>,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 등 메이저와 비주류 영화판을 넘나들며 거둔 성과는 엄청났다. 변방을 떠도는 이들과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점도 기록해야겠다. 이제 그가 <투 다이 포> 이후 24년 만에 호아킨 피닉스와 호흡을 맞춘다. 풋내기에서 연기 도사가 된 배우와 늙수그레한 거장 감독이 재회한 <돈 워리>는 처음부터 기승전결 구성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존 캘러핸이 참석한 토크 모임과 강연장 두 곳을 오가며 현재와 과거를 뒤섞는다. 시공간이 널뛰듯 뛰어도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보다 집중력이 높은 건 매끄러운 편집 덕분이다. 실존 인물을 다룬 전기영화이며 과정이나 결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른바 인간 승리로 내딛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적절한 방법이다. 사건을 파고들기보다 주인공이 맞닥뜨린 고통과 변화에 중점을 둔다. 반 산트 감독이 즐겨 쓰는 롱테이크 기법에 클로즈업을 빈번하게 사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 존 캘러핸 (호아킨 피닉스)에게 숙취 없는 아침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일찍이 13살부터 술병을 딴 사내가 맨정신으로 아침을 맞았다면 변고가 아니겠나. 예상치 못한 기갈에 오장육부가 난동을 부리자 낮술로 대응한 존은 술고래 덱스터(잭 블랙)와 새벽까지 달린다. 결국 존의 몸뚱이는 휴지처럼 구겨진 자동차에 낀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는 소문난 술꾼답게 이죽거렸다. “알코올 중독자란 자기만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자다.” 바다보다 술이 더 많이 사람을 익사시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여기 중독자들은 저마다 푸념을 늘어놓는다. “술을 즐기며 혼돈을 만드는 것과 술에 의존해 혼돈을 만드는 건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뭔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익히 알고 있는 한 마디면 정리가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다음엔 술이 술을,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잃어버린 주말>(1945)과 <술과 장미의 나날>(1962)은 알코올 중독의 폐해를 소름이 돋도록 묘사한다. 거실 선반에 놓인 술을 바라만 봐야 하는 존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수영장 물 속에 가라앉으며 술을 마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없이 부러웠을 터이다. 황홀했던 음주의 추억을 6개 숏으로 붙인 뒤 판타지로 연결하는 대목은 재치가 넘친다. ? 유년의 트라우마가 키운 주량인가. 폭음과 좌절, 고통을 전투 치르듯 묘사하지만 영화는 동정할 생각이 없거니와 갈등을 부풀리지도 않는다. 술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존이 술로 망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간다. 티베트 어느 첩첩산중 토굴에서 막 나온 듯한 리더 도니(조나 힐)는 존에게 자아 성찰의 1단계, 희망을 심는 2단계 등 금주와 치유의 12 단계를 제시한다. 존에겐 날마다 상처들과 씨름할 일만 남았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아누(루니 마라)를 만나면서 존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캘러핸 카툰이 중간중간 쉼표 찍듯 유머를 선사하고, 하나님을 사탄 인형 ‘처키’로 부르는 이유와 악마숭배에 모성을 얹은 스릴러 <로즈메리의 아기> 인용은 흥미를 더한다. “남자가 필요 없는 여자들보다 무서운 게 있겠어요?” 라는 대사에 꼬집히는 여자들 정체를 밝히진 않겠다. <마스터>와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베니스와 칸영화제를 장악한 호아킨 피닉스는 풍부한 표정으로 클로즈업을 너끈히 소화한다. 특유의 과장된 액션으로 허풍을 날리는 잭 블랙과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아름답게 나오는 루니 마라, 차갑고 무심한 척해도 속 깊고 지혜로운 조나 힐 등 조연진의 연기도 무르익었다. ? ? 무위자연의 삶, 도니가 설파하는 노자 철학은 고지를 눈앞에 둔 존을 통해 <도덕경> 28장으로 넘어간다. 원문은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세상의 본보기가 되면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무극, 다시 말해 우주의 근원이 되는 조화로움의 지극한 경지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미워할 대상이 많았고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렸으며 자신을 돌아보길 애써 거부한 존. 용서라는 말처럼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게 또 있을까. 흔히들 관용과 화해를 용서와 한 덩어리로 묶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 했다. 용서할 만한 것만 용서한다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담담하되 노련한 연출은 ‘용서와 치유, 자유의 시퀀스’ 라 부름직한 대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옹을 두 남자가 나눈다. 치사량의 고독을 그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엔딩 크레딧을 감싸는 는 생전의 존 캘러핸이 곡을 쓰고 직접 부른 노래다. 침대에 온몸이 묶인 채 신세를 한탄하는 존에게 아누가 속삭인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겠나. <돈 워리>가 특별한 영화로 다가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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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성자의 간구와 수난 / 영화 <행복한 라짜로>

[칼럼] 바보 성자의 간구와 수난 / 영화 <행복한 라짜로>

열리는 장소나 성격에 관계없이 경쟁 영화제는 우열을 다투는 축제여서 뒷말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칸영화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잡다한 시빗거리를 잠재우기에 충분한 결과를 내놓았다. 전율마저 유쾌한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하다는 공감대를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얻어냈으며, 유난히 우수한 작품이 많았던 작년에 이탈리아 영화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 Happy as Lazzaro)>에 안겨준 각본상 또한 썩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수십 년 전 신문에 난 우중충한 기사 몇 줄로 보석처럼 빛나는 각본을 완성했으니까. 침체한 이탈리아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젊은 여성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솜씨다. 배우가 없어도 대사와 음악을 빼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시나리오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대이자 설계도인 시나리오를 잘 쓰는 공식이나 요령이라는 게 따로 있겠나.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면 될 일이다. 성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주인공은 영화에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유럽 젊은이는 이전 순수파처럼 표정은 해맑아도 눈길이 머무는 곳은 전혀 다르다. 행복을 꿈꾸는 걸까. 남들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걸까. ? 이탈리아 두메산골 인비올레타.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처럼 드리운 곳이지만 시대 배경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궁핍한 살림과 고단한 얼굴만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노숙자 합숙소 비슷한 방 몇 개에 54명이 득시글거리고, 밤이면 전등 하나를 차례로 옮겨가며 불을 밝힌다. 농부들은 알폰시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담배 농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지만 빚만 늘어가고 아이들은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부르는데, ‘호출’과 ‘호구’가 이음동의어로 느껴질 지경이다. 농사일을 거드는 건 기본이고 무거운 짐이며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번쩍번쩍 옮길 뿐 아니라 꼬마들과 놀아주거나 커피 배달까지 담당하는 청년 라짜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아무리 궂은 일을 떠맡겨도 눈살 한 번 찌푸린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지능이 낮거나 뇌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겸손하고 잘 생긴 이탈리안 마당쇠. 어느 날 후작 부인이 병약한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를 데리고 마을에 온다. 아들이 휴대 전화를 꺼낼 즈음에야 비로소 세상 풍경이 잡힌다. 농노를 부리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소작제가 폐지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후작 부인과 아들의 대화가 섬뜩하다. “저들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깨닫게 되지.” 부인의 말대로 귀족은 농부들을 착취하고 농부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특히 교육과 신앙을 미끼로 던진 후작 부인의 수업이야말로 고도의 세뇌 작전이다. 충직한 라짜로가 마음에 든 탄크레디는 살갑게 굴며 적절히 부려먹는다. 철부지 반항아인지 몽상가인지 종잡을 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꾸민 연극은 마을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온다. 로르와커 감독이 매직 리얼리즘의 붓으로 우화를 새길 화폭을 짜는 시점이다. 내레이션과 다양한 앵글, 역광과 몽환. 전반부를 느슨하게 매듭짓는 이 대목은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딱 한 줄로 정리하겠다. ‘선한 사람 냄새’와 초월적 존재. 휴식 시간에 잠깐 눈을 붙였다 장르가 다른 연주에 깨어나는 느낌일까.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새롭고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 직진한다. 그렇다면 그에겐 ‘등장’이 아니라 ‘강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후작 부인에게 빌붙었던 농장 관리인?니콜라는 늙었지만 착취 수법은 새롭다. 이주노동자들을 밥줄로 농락하는 대목에선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지기보다 “성격은 운명”이라는 옛 철학자의 말을 믿고 싶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를 자처하는 전자 기업이 나라 밖에서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현지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있으니까. 탄크레디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1963)에 나오는 귀족 이름이고, 라짜로는 신약성서의 나사로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는 나사로 둘이 나오는데 한 명은 예수의 눈물어린 기도로 무덤에서 살아났고, 다른 한 명은 거지로 죽어 하늘나라 부자로 영원히 산다. 두 나사로를 합친 듯한 라짜로는 어느 장면에선 예수의 현신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간구.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번영의 도시에서도 여전히 밑바닥을 헤매는 옛 동지들에게 라짜로는 또다시 모든 걸 내준다. 하지만 바보 성자에게 닥치는 배반은 잦고 감사는 짧고 수난은 길다. 소작농 패거리들이 한 끼 포식하려다 낭패를 보는 과정에서 터지는 웃음은 쓰디쓰다 못해 멀미가 날 지경이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다는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그윽한 눈빛은 물이 모래를 적시듯 넓고 깊게 파고든다. ? ? 성당 시퀀스는 127분 러닝타임에서 가장 빛난다. 다시 예수의 채찍질이 필요한 교회. 황홀하게 감겨 스산하게 내려앉는 선율. 얼마나 더 굴러 떨어져야 바닥이 보일까. 막막하고 난감하고 허탈한 시간 그리고 한줄기 눈물의 의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김현승의 시 <눈물>중에서). 하퍼 리 소설로도 유명한 영화 <앵무새 죽이기>(1962)에서 그레고리 펙의 아들에게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단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내세운 영화답게 환상과 환멸을 넘나드는 연출이 좋고, 필름 고유의 질감을 살린 촬영과 디테일 묘사도 돋보인다. 단역들의 조화롭고 자연스런 연기는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이자 자랑이다. 다만 늑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에선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우화에서는 교훈이 두드러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바보. 타인의 아픔을 못 견디는 사람. 끝 모를 사랑과 자비. 거룩한 희생. 그렇다면 당신 영혼의 눈은 열려 있는가. 겉모양으로 판단하고 낮은 소리엔 귀를 닫지 않는가. 선뜻 내주기보다 끝까지 뺏은 적은 없는가. 학대에 길들여지진 않았는가. 선한 이웃으로서 향기를 품고 있는가. 질문은 거세지만 <행복한 라짜로>는 교만하고 이기심에 찌든 마음을 거듭 행궈준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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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인간을 품은 영상 회고록 /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칼럼] 시대와 인간을 품은 영상 회고록 /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올해 제72회 칸영화제는 독특한 자세를 취한 어느 여성의 모습을 공식 포스터로 지정했다. 이전 칼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소개한 영화 촬영장 사진인데, 흑백이었던 원판에 색상을 입히고 배경을 바꿔 넣었다. 높다란 탁자 위에 무릎을 접은 중년 남자가 카메라 지지대를 붙들고 있고, 웬 젊은 여성이 남자의 등을 짐짝처럼 밟고 서서 뷰파인더에 눈을 붙인다. 원판을 눈여겨보면 일부러 꾸민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열정의 순간 포착 또는 몰입의 어떤 경지. 당돌하고 짓궂은 포즈대로 65년 예술 인생은 거침이 없었다. 창조와 실험, 여성과 사회, 독창성과 보편성.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명예 오스카상을 받고 안젤리나 졸리와 흥겹게 춤추던 때가 89살. 소탈하고 넉넉한 표정에 동글동글 빨간색 바가지 머리. “나는 스스로를 거장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동안 아주 정직하고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나는 그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수는 있겠지요.”라는 마지막 목소리. 이제 숙연한 마음으로 그의 생년과 몰년을 괄호로 여닫아 올린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 (1928 ~ 2019). ? ? Photo : La Pointe courte / 1994 Agn?s Varda and her children - Montage & design : Flore Maquin 아녜스 바르다에게 붙여진 ‘과소평가된 감독’이라는 의견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에겐 제대로 평가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가뭄에 콩 나듯 영화제서나 비칠 뿐 바르다 영화가 한국 극장에 처음 걸린 건 딱 1년 전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방랑자>는 물론 첫 장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비롯해 대표작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도 극장가엔 얼씬도 못했다. 2001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바르다 감독을 주목한 언론도 드물었다. 이번엔 모든 걸 쏟아 부은 마지막 작품이 들어왔는데도 복합상영관들은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또다시 외면했다. “예술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들만의 굳은 맹세인가. 전국을 통틀어 10개를 겨우 웃도는 스크린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바르다 감독에게 영화란 보여주는 것. 함께 보고 감정을 나눠야 하는 일. 텅텅 빈 영화관은 악몽이라며 고개를 젓던 바르다.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이가 악몽에 시달릴 일은 없겠지만,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이 만든다는 건 확실하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통해 극장이 ‘검은 도서관’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 제목에 걸맞게 영화는 마스터 클래스, 무대에 오른 감독의 강의로 시작한다. 바르다는 자기 연출 작업의 세 요소로 ‘영감’과 ‘창작’, ‘공유’를 꼽는다. 왜 만들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며 누구와 함께 나누는가. 영화(cinema)와 글쓰기(ecriture)를 결합해 창안한 ‘영화 쓰기(cinecriture)’ 는 바르다 영화의 원천인데, 작가의 개성이자 사상을 실어 나르는 바퀴인 문체에 비유할 수 있다. 바르다의 바퀴살은 콜라주와 퍼포먼스,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자유연상과 무의식의 심층. 착상부터 촬영과 편집을 거쳐 믹싱으로 마무리하기까지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무에게 송구스러울 정도로 조악한 회고록이 판치는 현실에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써내려간 영상 회고록을 보는 일은 즐겁다. 자신이 연출한 장, 단편 영화 20편을 선택한 바르다는 중요한 장면을 뽑아 간결하되 정확하고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다. 예를 들면, <방랑자>에 구사한 13번의 트래킹 숏(레일을 타고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 찍는 장면)을 얘기할 땐 카메라를 얹은 이동차에 직접 올라 부드러운 리듬의 효과를 알려주는 식이다. 그뿐 아니다. 떠돌이 노숙자 역을 맡았던 상드린 보네르를 현장으로 불러 17살 시절에 즐긴 ‘절대 자유’의 흔적을 찾아보며 감회에 젖기도 한다. ? 때론 인생이 영화를 만든다. <낭트의 자코>는 죽음을 앞둔 남편 자크 드미 감독에게 바치는 아내 바르다의 영화 찬가이자 절절하고 아름다운 순애보이다. 극대화한 클로즈업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화가는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감독은 퀴퀴한 시장 바닥에서 희망을 줍는다. 디지털 카메라가 지닌 현장감을 빼어나게 활용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생물학 석사를 포함한 걸인들은 버려진 걸 먹지만 정신만은 더 없이 풍요롭다. 할리우드로 건너 가 <블랙 팬서>를 찍을 땐 ‘침묵하는 다수’와 ‘분노하는 소수’ 사이에서 흔들리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작 <시몽 시네마의 101의 밤>엔 미국과 유럽의 별들이 다 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드 니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해리슨 포드,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 까뜨린느 드뇌브와 미셸 피콜리 등 세계영화사에 전무후무한 배역진인데,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 성적은 수수께끼로 남기겠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바닷가에서 꿈을 키운 80살 감독의 자화상이다. 거울과 종이 자동차와 빗자루, 폴 발레리의 시가 생각나는 장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무덤에 누가 잠들었는지는 스포일러 수준이니 밝히면 곤란하다. ? 사진가와 설치 미술가로서 발걸음도 씩씩하다. 연극 무대에서 출발한 바르다의 스틸 카메라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부터 살바도르 달리와 펠리니 감독을 거쳐 전족을 내민 중국 할머니까지 맹렬하게 셔터를 눌렀다. 쓸모없는 필름 가닥마다 햇살을 나눠줘 아늑하게 꾸민 ‘영화 오두막’을 분점처럼 하나씩 늘려가기도 했다. 바르다에게 예술이란 국가와 문화, 성별과 신분, 민족과 종교를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였다. 하트 모양의 튼실한 감자가 점점 쭈그러드는 사진과 영상을 실제 감자와 함께 배치한 <감자 유토피아>. 시들어가는 기쁨이라니.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던 바르다 감독은 필생의 엔딩을 몸 전체로 찍는다. 필멸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너지고 가라앉기보다 희미하게 사라지리라. 쓸쓸하고 덧없으나 가장 영화다운 작별. 그제야 비로소 115분 영상이 회고록을 넘어 유언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목적, 효용이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기 바란다. 감독을 지망하는 이들에겐 나침반으로 작동할 터이다. 시대와 인간을 품고 꿋꿋하게 외길을 걸어간 예술가. 위대한 정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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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빛과 그림자 / 영화 <논-픽션>

[칼럼] 디지털 시대의 빛과 그림자 / 영화 <논-픽션>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보내는 메일을 ‘email’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e’가 없어지고 그냥 ‘mail’이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ebook’도 그냥 ‘book’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을까.” 9년 전, 일본의 IT 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가 <전자책의 충격>에서 종이책의 운명을 가늠해 본 대목이다. 그가 예상한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전자기기가 독서의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인쇄술에서 네트워크로. 지적 공간의 새로운 생태계 구축. 길고 뛰어난 수명과 내구성, 저장성과 접근성. 구글은 십 수 년 전부터 도서관의 엄청난 책들을 코딩해왔고, 종이책을 팔던 아마존은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반듯하게 키워냈다. 음악의 디지털화에 성공한 애플도 태블릿 아이패드로 삼국지 전자전에서 컬러풀한 화력을 뽐낸 지 오래다. 버글스가 부른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미디어 변천사를 얘기할 적마다 수 없이 인용돼 온 노래다. 전자파에게 피습당한 종이책도 사망 신고를 내야할 처지에 이르렀나. 이제 종이책 읽기는 고상한 빈티지 취미로만 남을 것인가. 소멸이냐 공존이냐. 출판업계의 실상을 중심에 둔 프랑스 영화 <논-픽션(Non-Fiction)>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이들의 불안과 갈등, 고민을 숨 가쁘게 풀어놓는다. ? 연출을 맡은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아시아 문화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프랑스 감독이다. 홍콩 영화에 열광한 청소년에서 열혈 청년 평론가로 문필을 날린 아사야스는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완령옥>으로 홍콩 영화를 세계에 알린 장만옥을 파리로 불러들였다. 줏대 없는 프랑스 영화 산업을 야무지게 꼬집은 <이마 베프(1996)>를 촬영하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결혼했으나 3년 만에 갈라섰다. 5년 뒤 <클린>에 장만옥을 다시 주인공으로 세운 아사야스는 동료로 돌아간 옛 연인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훗날 장만옥은 “영화를 보는 관점을 키워준 이가 아사야스 감독”이라고 술회했다. 난데없이 케케묵은 스캔들을 꺼내는 건 <논-픽션>의 결말부가 주는 느낌 때문이다. 아사야스 영화라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를 먼저 손꼽을 듯싶다. 거기서 스크린 안팎 배우들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 연출에 감탄했다면 이전 작품도 찾아보기를 바란다. 예술의 가치와 영속성을 수채화처럼 새긴 <여름의 조각들>, 유럽 좌파를 사로잡은 제3세계 전사의 일대기 <카를로스>, 혁명과 예술을 함께 꿈꾼 시대를 되돌아본 <5월 이후> 등 소재는 다양하고 완성도는 높다. 이제 아사야스 감독의 재산 목록에 <논-픽션>을 추가해야겠다. ? 출판사 편집장 알랭(기욤 까네)은 전자책이 몰고 올 파장에 흔들린다. 오랜 친구인 소설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가 새 작품의 출간을 부탁하지만 창작자로서 그의 사고와 태도에 믿음이 가질 않는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범죄 수사극의 강인한 캐릭터로 인기를 모은 배우인데, 감수성은 풍부해도 차기작 선택엔 지나치게 신중하다. 국회의원 비서관 발레리(노라 함자위)는 남편 레오나르와 달리 활달하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여기에 종이책 시대를 끝내고픈 로르(크리스타 테렛)라는 디지털 마케터가 끼어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랑스 원제 <이중생활(doubles vies)>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종이책을 옹호하면서도 태블릿을 끼고 사는 나날, 가정에 충실한 이가 빠져드는 불륜, 자신의 경험을 허구로 포장해 활자로 옮기는 작가, 속아주면서도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 등 대다수가 위태롭게 경계를 넘나든다. 심리학자에겐 양가감정이나 딜레마로 비칠 수도 있겠다. 커피 한잔 즐기는 시간인 5분 만에 책이 나오는 ‘에스프레소 북 머신’. 도서관은 책의 창고로 머물 뿐 책의 내용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증거일 터이다. “글로 된 인류의 기억 전체를 인질로 삼아 사용자들을 광고주에게 판다.” 2천만 권 이상을 전자화한 글로벌 기업의 폭주에 토론자들은 한 목소리로 탄식한다. ? 상영시간 108분에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1687개. 그야말로 언어의 향연 아니 말 폭탄이다. 문화 예술 전반을 아우르며 터뜨리는 작품과 인물을 거론하기엔 지면이 좁다.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과 베리만 연출작 <겨울빛>에 최근작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보탠다.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에 원작을 제공한 시칠리아 작가 람페두사를 필두로 독일어권 문학의 이단아 토마스 베른하르트, 로맨스 소설의 대모 노라 로버츠, 철학자 아도르노, 화가 모네, 시인 말라르메 등 대충 추려도 어질어질하다. 신경증에 오지랖과 입심을 자랑하던 전성기의 우디 앨런이 울고 갈 지경이다. “서로 알지만 말려들고 싶진 않은 게 암묵이지.” “탈진실의 시대야, 각자의 선입관이 정해준 허구 세계에서 사는 거지.” 같은 아포리즘 수준의 대사를 쏟아내는가 하면, 신뢰나 소비 분석 알고리즘으로 정치인과 비평가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장소를 바꿔가며 토론과 논쟁을 이어가는데, 실없거나 허투루 사용한 대사는 찾기 어렵다. 따분하게 들리지 않거니와 현학 취미와도 거리가 멀다. 유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건 상황과 비유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소신과 무실서와 혼돈을 이야기할 땐 5세기 유럽을 거의 삼켰던 훈족왕 아틸라를 비롯해 정복자 칭기즈 칸,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인용하는 식이다. 대사의 리듬과 강약을 조절하는 카메라와 편집이 돋보인다. ? 과학기술의 총화로 일백년 가까이 군림한 필름이 몸 둘 바를 모르는 영화 시장.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놀던 영사실의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멈췄다. 사라졌고 사라지는 것들. 미련과 반추, 향수. 아사야스 감독이 굳이 16mm 필름으로 촬영해 35mm로 확대한 이유일 것이다. 입자가 거친 영상이지만 몽당연필로 종이책에 밑줄을 긋는 것처럼 정겹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당당하다고 주장해도 불륜을 독려하거나 권장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여기 불륜 행위는 너저분한 패륜이라기보다 느긋한 바람기 정도로 비친다. 악다구니 치거나 징징대지 않으며 무책임한 욕정을 자극할 생각이 없다. 특히 야릇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에선 관록과 경륜이 느껴진다. “쿨하다”는 표현은 낡았어도 아직은 쓸 만하다. 근엄한 도덕론자라면 질색하거나 당혹스러울 수 있겠다. 삶이라는 현실에 담긴 수많은 허구, 불안과 확신의 공존, 진실과 거짓의 충돌, 침묵과 은폐, 모순과 아이러니의 인생사. 실제 이름을 통해 짧지만 크게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주제와 맞닿아 있다. 픽션과 논픽션, 팩션이 뒤엉켜 도돌이표를 찍는 기분이다. 디지털 변혁의 시대를 맞아 관계와 상황과 흐름을 격조 있게 탐구한 <논-픽션>이 남긴 메시지는 두 대사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안 변하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 “관습과 기준을 넘어선 인간의 재발견이 디지털의 과제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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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과 고난도 섭리이거늘 / 영화 <퍼스트 리폼드>

[칼럼] 역경과 고난도 섭리이거늘 / 영화 <퍼스트 리폼드>

어둔 밤, 한 남자가 노트에 무언가를 골똘히 기록한다. 책상 끄트머리엔 그의 취기를 짐작케 하는 술병이 놓여 있다. 그리고 큼직하게 가로질러 휘갈긴 ‘I have found a new form of prayer’라는 마음의 소리. 폴 슈레이더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포스터와 광고 문안이다. 제목은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교회를 가리키는데 250년 전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뉴욕 북부에 세웠다. 어둡고 혼란스런 중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영문 표기가 일러주듯 기독교(개신교)의 출발은 개혁이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면죄부를 판매할 정도로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무너뜨렸고 유럽 전체의 역사와 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제는 종교가 개혁과 변화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크기만 키우려 힘을 쏟을 뿐 시대의 아픔과 낮은 자리는 외면한다. 아름답게 창조된 천지만물에 감탄하면서도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뒤척이며 잠을 설치는 이 성직자는 어떤 새로운 형태로 간구하며 견뎌낼 것인가. ? ? 41년 동안 시나리오 18편 집필에 연출 작품은 21편. 다양한 소재를 폭 넓게 다뤘거니와 열띤 논쟁을 끌어냈어도 졸작이 드물다는 점에서 폴 슈레이더의 영화 재능은 높이 평가받아야겠다.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 각본가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어플릭션>과 <미시마>에서 보여준 연출력도 대단했다. 빛보다 어둠을 탐색하며 희생과 구원의 의미를 물었던 슈레이더의 눈길은 여전히 차갑고 무겁다.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일찍이 흑인 노예들을 보호해 탈출시킬 만큼 앞서 나간 교회였지만, 지금은 교인 몇 명만 자리를 채울 뿐 ‘기념품 가게’ ‘관광 교회’로 전락한 처지다. 담임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한 땐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지금은 혼자다. 가족사에 얽힌 죄책감과 절망감에 술을 끊지 못하고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진다. 어느 날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라는 신도로부터 남편 마이클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환경운동가 마이클에겐 전쟁보다 무서운 게 환경오염과 자연훼손이다. 아내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것도 오염된 세상에선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면밀히 분석한 환경 영향 보고서는 외골수 운동가를 더욱 과격하게 만든다. 니체가 그랬던가,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라고. ? “인류의 위대한 업적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삶이 위기에 처했다.” “인류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밤이 깊을 때 어둠에 맞서 일어나곤 했다.” “자연을 지키려던 운동가들이 작년에만 117명이 죽었다.” 대화는 팽팽하게 이어지는데, 반박할 논거가 빈약한 톨러는 수세에 몰린다.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모두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나왔으니 지구는 모든 생명체의 집이 아니겠는가. ‘풍요로운 삶 교회’ 목사 제퍼스(세드릭 더 엔터테이너)는 이상만 쫓는 성직자 아니 실속 없는 관광 가이드 톨러에게 핀잔만 준다. 더 풍요롭기를 갈망하는 제퍼스 모습에서 세속주의와 상업화, 대형화로 치닫는 오늘날 교회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통계와 자료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신앙에 의존할 것인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모든 보존 행위는 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톨러. 밤마다 쓰는 내면일기는 고뇌와 탄식으로 채워진다. 갑자기 맞닥뜨린 섬뜩한 사건과 곤혹스런 해결책은 그의 실천적 행동에 불씨를 지핀다. 성직자가 주인공이어서 요셉과 야곱, 욥 같은 구약 시대 인물에 몇몇 성서 구절이 들리지만 부담을 안기거나 근거도 없이 난해한 척 하지 않는다. ? ? 슈레이더는 20대 중반에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감독 연구서를 펴냈다. 그래서일까. 몇 대목은 로버트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와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잉그마르 베리만의 <겨울 빛> 같은 걸작 고전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끌어다 쓴 게 아니고 참고로 삼은 수준이니 쓸데없는 트집을 잡으면 곤란하다. 숏 12개를 몽롱하게 이어간 '마법의 여행'은 포르투갈 영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과 포즈는 비슷해도 용도는 전혀 다르다. 톨러에게는 신비롭되 고통스런 체험이었으니까. 카메라는 배경이나 구도보다 주인공의 심경 변화에 초점을 맞춰 나간다. 고통의 사제가 자신만의 ‘First Reform’을 완성하는 과정일 터이다. 근사하게 나이 든 에단 호크는 향기 나도록 무르익은 연기를 보여주는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랐으니 말문이 막힌다. 톨러가 영적 스승으로 흠모하는 토마스 머튼(1915~1968)은 자서전 <칠층산>에서 자신의 삶을 ‘지속된 회개의 연속’이었다고 토로했다. “나는 두렵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까봐.”라는 고백. 방황하는 톨러에겐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로 들렸을 듯싶다. ?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에 있는가. 베리만 감독이 평생토록 씨름한 화두는 ‘신의 침묵’이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도 <사일런스>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화답 없는 신을 향해 기도만 해야 하는가. <퍼스트 리폼드>도 믿음과 의심의 문제를 건드린다. 유한한 삶, 내던져진 인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니아 연대기> 원작자이자 <쉐도우 랜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C. S. 루이스의 말은 귀 기우릴 만하다. “신이 드러내 놓고 직접 세상에 간섭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뜻을 알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세상이 끝나는 날이다.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이다.”?후반부에 들어 슈레이더 감독은 스릴러를?표방한 이유를 확인시킨다. “종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인가. 어쩌면 '지하디즘'의 야릇한 변형. 성가 <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는?19세기 말에 작곡한 곡이기에 <더 브레이브>와 <와일드 빌> 같은 서부극에 자주 쓰였다. 여기서는 재즈풍으로 편곡해 여성 솔리스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흐르는데, 교차 편집의 효과가 크다. 돌진과 회전 그리고 침묵. 느닷없는 적막감에 조금은 당혹스럽지만 결말부에선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원리. “역경과 고난도 섭리”라는 겸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역설. 수난과 희생, 부활을 알리는 4월에 어울리는 영화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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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고효율의 스릴러 / 영화 <더 길티>

[칼럼] 저예산 고효율의 스릴러 / 영화 <더 길티>

바이럴 영상 한 편이 화제다.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확산된다고 해서 붙여진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은 어원대로 입소문 촉진 전략을 말한다. 특출한 광고 영상을 본 누리꾼들이 퍼 담거나 공유하는 식으로 전달해 상품을 알리고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방식이다. 화제가 된 바이럴 영상은, 맛보기 수준으로 영화 장면을 소개하거나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능청스런 대화를 곁들여 영화제 수상 경력과 나라 안팎 전문 매체들의 평가를 요란하게 띄운다. 제목마저 감춘 채 궁금증을 높이더니 개봉일이 미정이라는 사실만 강조한다. 영등위 등급 분류엔 아예 <개봉 미정>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제명으로 신청해 12세이상관람가를 받았다. 흥행 작전치고는 생뚱맞고 치기가 넘치지만 나무랄 수는 없겠다. 돈냄새 물씬한 작품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마을버스 배차하듯 스크린을 몰아주는 판이니 궁핍하고 맷집 약한 영화인들에겐 언감생심, 눈치만 보다 나가떨어지기 일쑤이다. 관객 천만 명 달성도 놀랍지 않은 현실에서 ‘풍년거지’ 신세의 영화들은 쪽박마저 깨질까 두렵다. 언제쯤 극장에 걸릴지 모르겠으나 정체를 밝히는 게 좋겠다. <더 길티(Den skyldige, The Guilty)>라는 덴마크 영화다. 관람을 마칠 즈음에 원제는 ‘유죄’보다 ‘죄책감’으로 읽힌다. ? ? 첫 장편 <더 길티>를 발표한 구스타브 몰러 감독의 이력은 단출하다. 31세, 스웨덴 태생, 덴마크 영화학교 졸업, 단편 <어둠 속에서(In Darkness)>로 ‘Next Nordic Generation’ 상 수상. 감독 데뷔에 영향을 끼친 영화는 시드니 루멧 연출에 알 파치노 주연의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1975). 주인공이 한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대화나 모니터 화면으로 작품 전체를 꾸미는 방식은 새롭지는 않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로크>에서 운전대를 잡은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연은 통화와 독백만으로 풀려나간다.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의 <베리드>는 90분 동안 관 뚜껑을 열어젖힐 생각이 없다. 전체에서 5분을 뺀 모든 시간을 생매장당한 남자의 목소리로 채운다. <서치>에서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노트북과 유튜브, 페이스북 등 디지털 영상만으로 사건을 매듭짓는다. <더 길티>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상영시간 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앞질러 얘기하면 세 작품에 견줘 규모는 작고 서사는 간결하지만 몰입감과 반전은 조금 더 높고 강하다. 할리우드에서 제이크 질렌할을 내세워 리메이크에 들어간다는데 스포일러를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 어둔 밤 112 긴급 구조 센터에서 근무 중인 아스게르 홀름(야곱 세데르그렌)은 약물에 취한 주정뱅이의 헛소리를 들어주거나 홍등가에서 지갑을 털린 남자가 내지르는 푸념이나 받아줘야 하는 처지다. 그가 발이 묶여 장난질 전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은 중반부턴 대충 알아차릴 수 있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어느 여자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보채는 아기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 여자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차로 이동하는 상태라며 겁에 질린 목소리를 이어간다. 아스게르는 여자에게 “예, 아니오”로만 답변할 수 있게끔 유도해 납치범을 안심시키고 자동차 추적에 나선다. 전화가 자주 끊기자 다급해진 아스게르는 규정을 어겨가며 혼자 사건을 해결하려는데, 동료 대원들은 오지랖 넓은 그에게 눈총을 보낸다. 여섯 살짜리 딸과 갓난아기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부부. 두 아이만 남은 집에 경찰관 친구를 보내고 본부에 차량 수배를 요청한 아스게르는 납치범의 신상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이들을 찾아간 친구가 알려온 소식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 현장이 아닌 구조 센터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수단은 전화뿐이다. 아스게르의 동료들은 몇 마디만 건넬 뿐 구경꾼이자 드라마의 병풍에 머문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아스게르 곁을 벗어나질 않는다. 1인 밀실 실험극이자 공간의 미니멀리즘. 잘 들을수록 잘 보이는 원리. 집중력에 따라 호, 불호가 갈릴 터이니 헤드셋을 착용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게 좋다. 클로즈업의 적절한 쓰임새를 비롯해 푸르고 붉은 조명을 번갈아 사용해 ‘내 코가 석 자’ 지만 본분에 충실하려는 사내의 피로와 불안, 고독을 담아내는 수법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정밀한 사운드 설계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본령을 확인하게 한다. 비 오는 소리와 차창을 닦는 와이퍼 움직임, 초인종 소리와 경찰차의 경적, 문 여닫는 소리 등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상하는 일은 오싹하면서도 즐겁다. 한정된 장소에서 전화로 실시간 중계하는 사건사고. 청각으로 화폭을 짜고 소리로 붓질하는 경험은 흔치 않을 터이다. 잔혹한 폭력과 무책임한 성욕으로 한몫 보려는 영화들의 흥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스웨덴 중견 배우 야곱 세데르그렌의 표정 연기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 반전이 기발한 스릴러를 이야기할 적마다 빠지지 않는 영화가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 센스>이다. 특히 두 작품의 스포일러는 그야말로 천기누설 수준이었다. 각각 수수께끼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한 케빈 스페이시와 브루스 윌리스의 정체를 까발리면 ‘쳐 죽일 놈’ 취급을 받아야 했으니까. <더 길티>의 주요 정보 또한 그에 버금갈 정도이니 입이 근질근질해도 앙다물어야할 일이다. 인간적 이해와 긍정적 존중, 수용을 바탕에 둔 ‘감정이입’ 문제를 다룬 범죄 스릴러지만 한편으론 ‘구원과 속죄’의 주제로도 비친다. 결말부는 오스카 와일드의 따뜻한 독설을 떠올리게 한다.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성인은 누구나 과거가 있고 죄인은 누구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날개를 단 상상력. 예측하기 어려운 이야기와 강렬한 서스펜스, 경이로운 반전. 저비용에 고효율. 촬영 기간은 13일이면 충분했다는 점도 기록해야겠다. 자본과 스타가 영화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더 길티>를 본 영화인이라면 제작 여건 따위의 핑계를 늘어놓긴 어려울 터이다. 민망하고 구차한 변명, 그래서 유죄. 추리극과 스릴러 장르에 관심이 있거나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는 이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영화다.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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