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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칼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거창하게 실존주의 철학의 ‘내던져진(Geworfenheit)’ 존재로서 인간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땐 순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천수를 누리거나 시름시름 앓다 가거나 창졸간에 떠나버리거나. 예기치 않은 죽음, 특히 육친과의 황망한 작별은 보낸 이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원망과 그리움, 후회.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가 불러낸 마종기 시인의 <상처4>이다. ? 제목이 멋지다고 파라솔에 킹크랩 한 상이 차려질 듯한 ‘바닷가 맨체스터’ 쯤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놀랍게도 미국 북동부 지방의 실제 지명이니까.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인구 5천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화면엔 싸락눈 날리는 바다와 정박한 배들이 자주 비치니 지명이 풍경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면 풍경은 주인공의 내면 풍랑으로 요동친다. 브로드웨이에서 극작가로 이력을 다진 케네스 로너건의 감독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곁들여 성격이 전혀 다른 남매의 갈등과 화해를 다뤘는데, “고운 색실로 잘 뜨개질한 겨울 스웨터 같은 느낌”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로너건 감독은 이제 가족들의 통증을 엑스레이 사진처럼 들여다보며 주치의로서 처방전을 작성한다. 상처를 보듬을 것인지, 내버려둘 건지, 긁어 덧낼 건지. ? ? ? 바다낚시로 상쾌하게 첫 장면을 열더니 곧바로 우중충해진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 어느 아파트의 잡역부로 막힌 수도관은 시원하게 뚫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체증 걸린 표정에 인사성 없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게 ‘무뚝뚝’ 과 ‘무덤덤’이 삶의 신조라면, 오늘도 어제처럼 ‘그냥저냥 대충대충’은 생활 수칙이다.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리는 맨체스터로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피붙이의 주검 앞에서도 장의사 뺨치도록 무덤덤한 표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혼한 형수는 새살림을 차렸고 장례식은 땅이 녹을 때까지 늦춰진 싱숭생숭한 판에 난데없는 짐까지 떠맡아야 한다.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지정된 리.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처지지만 형의 유언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 삼촌을 '소 닭 보듯' 대하는 고교생 패트릭은 철부지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공부는 일치감치 포기했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어도 눈물은커녕 밴드의 보컬 소녀와 뒹굴고 싶은 궁리만 한다. 또래끼리 결성한 밴드 이름은 스텐토리안(Stentorian), 그리스 신화의 ‘목소리 큰’ 전쟁 영웅 ‘스텐토르’에서 파생된 말로 이들의 연주 실력은 아우성치는 수준에 그친다. 리에겐 철딱서니 없는 조카 녀석도 골치 아프지만 주위 눈길이 심상치 않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아이스하키 코치의 외마디를 떡밥으로 던진 카메라는 플래시백을 미끼로 사용한다. 랜디(미셸 윌리엄스)라는 여성이 나타나면서 무뚝뚝한 사내의 과거와 속내가 조금씩 드러난다. 예전처럼 페이드인, 아웃이나 이중인화 기법으로 차분하게 시공간을 넘나들지 않는다. 회상 장면은 암시나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현재와 뒤섞이니 집중력이 필요하다. ? 요즘 영화는 속임수와 복선, 뒤집기와 깜짝쇼 등 그야말로 스포일러의 지뢰밭이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어서 낮게 포복하는 자세로 헤쳐가야 한다. 리의 기억에 맨체스터는 끔찍한 생지옥으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라는 용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을 베고 살을 찢는 충격이었다. 순식간의 실수, 어떤 부부애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그리고 풍비박산. 리에게 인생이란 죽지 못해 사는 일, 아니 죽기보다 사는 게 두려운 나날이다. 걷는 것인지 떠밀리는 것인지 모를 리의 배회가 쓸쓸하고 춥고 막막하다. 케이시 애플렉은 ‘할리우드의 실력파 멀티 플레이어’ 벤 애플렉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비열한 남자로 잠깐 주목받았을 뿐 대부분 들러리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속담을 비웃으며 남우주연상 트로피 수집에 나선다. ? 지리멸렬과 상투성의 덫에 걸릴 위험이 도사린 소재였다. 하지만 메인 플롯과 곁가지, 1인칭 시점과 3인 시점을 능란하게 배치한 덕분에 러닝타임 137분이 부담스럽지 않다. 무엇보다 절제된 연출과 조화로운 연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철부지의 침대 소동, 얼린 닭과 냉동고에 누운 아빠 등 심심찮게 터지는 유머도 즐겁다. 아픔을 나누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옛 부부의 만남. 눈썰미가 좋다면 명품 유모차 브랜드에서 재혼녀의 살림 형편을 짐작했을 듯싶다. 부부는 갈라서면 남이라지만 랜디의 통절한 고백은 보는 이들의 명치끝을 쑤신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며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나. 녹슨 칼날로 톱밥을 톱질하는 꼴이다. 미셸 윌리엄스가 온몸으로 짜낸 흐느낌은 <밀양>에서 전도연이 토해낸 피울음에 견줄 만하다. ?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랭보 시인의 노래가 일러주듯 인생이란 고난을 통해 깨닫고 성숙하는 과정일 터이다. 하필이면 왜 내가 당해야 하냐고 분노할 일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자신 만의 고난이 있다. 문제는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운명애(Amor Fati)’를 들먹이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투의 어쭙잖은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 치유의 손길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리 챈들러가 쓰러져도 꺾이지 않기를. 인생의 혹한기를 자양분으로 삼기를. 상처가 깊을수록 향이 멀리 퍼지는 소나무처럼 말이다. 리의 마지막 표정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의지가 엿보인다. 좋은 영화는,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그 사람의 삶이 내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각성.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바로 그런 영화이다. ? 글.영화평론가_박평식 ? *영화 홍보용 스틸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2-01

  • 조회수 1464

소통과 화합의 언어학 SF 영화 < 컨택트 >

[칼럼] 소통과 화합의 언어학 SF 영화 < 컨택트 >

‘도착’이라는 뜻의 원제 <어라이벌(Arrival)>이 외국어 표기도 없는 <컨택트>로 둔갑했다. 족보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제목을 바꿔치는 수법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둔갑술은 모조품을 자처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당혹스럽다. 아마 ‘접촉’을 의미하는 ‘Contact’일 터인데, 이미 20년 전 극장가에 제목도 같고 소재도 비슷한 영화가 걸렸었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믿었던 과학자 칼 세이건의 소설을 각색한 <콘택트(Contact)>로 천문학자 역을 맡은 조디 포스터가 웜홀을 통과하는 장면과 빛에 휘감긴 직녀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니 ‘컨’인지 ‘콘’인지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하루바삐 본명을 찾아주길 바란다. 결코 아류작으로 치부할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가 원작으로 삼은 중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와 작가 테드 창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 ▲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 중국계 이민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난 테드 창은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학자로서의 삶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24세에 발표한 단편 <바빌론의 탑>은 역대 최연소이자 데뷔작으론 최초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SF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네뷸러 상을 받았다. 그는 작품 한 편을 내놓으려면 길게는 7년까지 뜸을 들이지만,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한 묘사’, ‘황홀한 지성의 파노라마’ 같은 찬사를 얻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테드 창 소설은 과학적 가설을 이야기 중심에 두는데, 과학을 삶 자체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특장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학 교수가 외계인들과 소통하는 과정과 딸에 대한 기억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짜낸다. 스필버그 감독의 1977년 작품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대목도 비친다. “생각과 다르게 기억이 돼. 내겐 처음과 끝이 별 의미가 없어.” 영화는 어느 모녀의 즐겁고도 아픈 시간을 퍼즐 조각처럼 늘어놓더니 알쏭달쏭한 대사로 도입부를 꾸민다. 지구 곳곳에 길쭉한 반원형 거울 모양의 외계 비행선 12척이 도착한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어떤 의사 표시도 하지 않자 나라마다 주식값 폭락과 사재기에 폭동까지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언어학자 루이스 (에이미 애덤스)를 앞세운 탐사단을 현장에 파견한다. '언어는 문명의 초석이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라는 신념을 지닌 학자답게 루이스는 외계인과 말문을 트려 애쓴다. 흉물스럽게 꿈틀거리는 동작과 기괴한 발성. 외계인들에겐 그리스어로 7이라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헵타포드(heptapod)’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그들 언어는 수묵화 그리듯 먹물을 뿌리거나 초보자의 그래픽 디자인 같은 형태의 표의 문자로 비선형 철자법, 즉 시제도 없고 앞뒤를 구분할 수도 없으며 부분을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하는” 광선처럼. ? 원작에서는 도표를 사용하거나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지만 영화는 그런 방식을 취하기 어렵다. 무한대의 상상과 설명이 가능한 문자 언어와 달리 영상 언어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원작의 예를 들면, “언어적이지만 비음운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개념.”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 등 관념의 문장화나 의식의 흐름, 행간의 의미를 화면에서는 다이얼로그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높낮이나 길이가 어떻든 대사를 통한 설명만으로는 관객의 시선을 붙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영화란 설명의 기술이 아니라 묘사의 예술이다. 감독은 원작의 ‘사피어-워프 가설’이나 ‘논 제로섬 게임’을 소개하지만 단 두 장면으로 간략하게 묘사한다. 만일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나 ‘물질 우주의 양의적 성질’, ‘보르헤스풍의 우화적 이야기’까지 끌어들였다면 관객들의 머리는 쥐가 났을 터이다. ? ? ▲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소설은 화자의 시점으로 설명에 치중한다. 난삽하거나 장황한 소설을 스크린에 이식할 때는 활자의 무게에 눌리지 말고 곁가지를 치고 군더더기를 걸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다.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SF스릴러 <타임 패러독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지만, 복선을 깔고 암시하거나 강조하는 수법은 한 수 위다. 루이스의 딸 이름 ‘한나(HANNAH)’에 얽힌 사연, ‘무기’와 ‘도구’로 다르게 읽히는 단어, 국제깡패들의 공격 논리 등 첩보 영화에서나 보임직한 극적 요소도 적잖다. “혹시 그들의 언어로 꿈을 꾸고 있는 거요?” 헵타포드의 언어와 사고를 이해하면서 루이스의 삶과 목적엔 변화가 일어난다. 에이미 애덤스의 섬세한 감정선과 다양한 표정 연기가 볼 만하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아요.” 천기누설급 정보이기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시간의 비밀을 체득한 누군가의 작은 몸짓 하나가 인류의 파멸을 막는다는 정도는 귀띔할 수 있겠다. ? 공상과학 영화치고는 규모도 작거니와 휘황한 볼거리도 없다. 무엇보다 속임수와 허풍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증오만 남은 세상에서 죄악의 계보를 펼친 <그을린 사랑>과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어 폭력의 속성을 파헤친 <시카리오>로 서스펜스의 본령을 확인시킨 드니 빌뇌브 감독은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면서 결정론을 곁들인 인간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도입부와 톱니처럼 맞물리는 후반부 플래시백, 시제의 의문을 푸는 교차 편집, 특히 성찰과 긍정의 퍼즐을 완성하는 엔딩이 기막히다. 세상을 인과적으로 볼 것인가, 목적론적으로 볼 것인가. 인생 여정의 굴곡을 미리 아는 건 행복일까. 미래가 밝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한 번뿐인 인생,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니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일이다. 슬기롭고 당당한 루이스에게 시 한 편을 들려주겠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 (김종삼의 <평화롭게> )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 작성일 201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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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을 부수며 너만의 인생을 살라,  영화 < 캡틴 판타스틱 >

[칼럼] 관습을 부수며 너만의 인생을 살라, 영화 < 캡틴 판타스...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감독상은 ‘황금카메라상’과 함께 젊은 영화 재능을 발굴, 격려하기 위해 도입했다. 미국 영화 <캡틴 판타스틱 (Captain Fantastic)>도 눈길을 끌어 감독상을 받더니 지난 7월 20회에 접어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개막작으로 뽑혔다. 제목은 물론 내용과 형식이 영화제 성격에 딱 맞아떨어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축포를 쏴 올렸는데, 개막작답게 완성도가 높아 관객들도 흡족했을 듯싶다. 의미에 재미를 보탠 작품을 만나기란 흔치 않으니까. 연출을 맡은 맷 로스는 <굿나잇 앤 굿 럭>, <아메리칸 사이코>, <에비에이터>에 잠깐씩 얼굴을 내민 배우이자 각본가로 활동했다. “생각하게 하면서 마음을 움직여야 좋은 영화다.” 두 번째 연출작을 발표한 풋내기 감독이지만 맷 로스의 당찬 주장은 새겨들어야겠다. ? ▲ <캡틴 판타스틱> 홍보용 스틸사진 ? 햇살이 틈을 비집는 울창한 정글. 털북숭이 사내가 사슴을 단 칼에 죽인 소년에게 피투성이 내장을 먹인다. 원시 부족에서나 보임직한 성인식이다. 벤(비고 몬텐슨)은 외딴 숲에서 여섯 남매를 홀로 키운다.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냥과 격투, 암벽 타기로 생존술을 익히는 아이들. “미국의 의료는 과잉이고 교육은 저질”이라는 벤의 판단은 홈스쿨링으로 결실을 본다. 학교 그림자도 밟아본 적이 없지만 아이들은 머릿속에 도서관을 하나씩 세우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같은 고전을 비롯해 <총, 균, 쇠>와 <우주의 구조> 등 문학과 사회과학, 물리학으로 토론을 끝낸 뒤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머리를 식힌다. 6개 국어를 구사하는 큰 아들은 아버지 몰래 하버드와 예일, 프린스턴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받아 놨다. ? 캡틴 벤이 아이들을 통제하는 모습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일곱 남매를 훈련병처럼 키우는 트랩 대령을 떠올리게 하는데, 융통성이 없거나 매몰차지는 않다. 7살짜리 막내에게 가르치는 성교육도 자상하기가 비뇨기과 의사를 뺨치는 수준이니까. 남다르게 살아도 행복에 겨운 이들 유기농 공동체와 자연에 파묻혀 자신만의 낙원을 꾸려간 인물들이 겹쳐진다. 자급자족하며 채식주의자로서 조화롭고 충만한 생애를 보낸 헬렌과 스콧 니어링 부부, 월든 호숫가에 28달러짜리 오두막을 짓고 농사와 고기잡이를 했던 <시민불복종>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타인의 시선이나 관습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삶을 산 사람들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쟁을 요구하는 세상,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라 숨 가쁘게 남을 쫓아가야 하는 제도와 환경. 수저 색깔을 따지는 양극화 사회라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 ▲ <캡틴 판타스틱> 홍보용 스틸사진 ?? “민중에게 권력을! 권위에 저항하라!” 콜라를 '독이 든 물'로 취급하는 벤 가족들은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생일을 국경일처럼 여긴다. 그러니 이들에게 글로벌 자본주의와 다국적 기업, 신자유주의 따위는 비단보에 싸인 개똥이나 다름없다. 숲을 멍석으로 삼아 나뒹구는 아이들이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었을까. 적어도 유년기 부문에선 밑줄을 쳤을 게 분명하다. 괴테가 ‘교육의 자연복음서’라 평가한 <에밀>에서 “어린이는 자유롭게,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게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습과 규칙을 거부해도 좋다”는 대목은 이들 유기농 가정의 가훈처럼 들린다. “미국의 국익은 비즈니스다.” “인간은 말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 “조직화된 종교들은 위험한 동화.” 목청을 돋우는 벤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꿈꾸지도 모른다. <반지의 제왕>시리즈와 <이스턴 프라미스>로 친숙해진 비고 몬텐슨의 진중하고도 능청스런 연기가 빛난다. ? 소박해서 아름답고 투박해서 정겨운 가정에 위기가 닥친다. 아이들에게 투병중인 어머니 레슬리의 부음이 전해지는 시점부터이다. 레슬리는 환몽의 이미지 쇼트로 짧게 비치지만 벤과는 달리 덕성과 지혜를 상징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섯 남매와 장인에게 불청객으로 찍힌 벤이 먼 길을 떠난다. 쉼 없이 유혹하는 번영의 도시. 몸도 마음도 강철로 키워진 아이들이지만 낯선 자극엔 움츠러든다. 처음 만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큰 아들의 프러포즈는 황당한 재롱으로 비칠 지경이다. 흔들리는 자식들과 당혹스런 아버지. 금과옥조로 여긴 공동체의 규율에 아이들이 의심을 품게 되자 벤의 외골수 신념에도 경련이 일어난다. '다르다'를 '틀리다'로 읽는 세상에서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올바른 부모로 사는 조건은 무엇인가. ? 광신도 행세와 '음식 해방 임무', 낙상과 시신 탈취, 인도식 작별 등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소동을 이어가던 영화는 여리지만 이유 있는 항변을 곁들인다. “책 밖의 세상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아빠가 우리를 괴물로 만들었어.” 야성을 잃어버린 캡틴을 원시림으로 되돌려 보낸 부하들은 빌딩 숲에서 버틸 수 있을까. 슬쩍슬쩍 뒤틀어 웃기고 뒤통수를 치는 수법이 만만치 않다. 독창성을 살리면서 보편적 주제를 새롭게 해석한 감독의 마지막 질문이 바늘처럼 찌른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타협인가, 자발적 고립인가.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음악은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I Shall Be Released(난 풀려날 거야)]로 무고한 죄수의 소망이 담긴 노랫말은 음미할 만하다. 세상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당부한다. “늘 진실만 말하고 비굴해지지마. 용기와 패기를 만끽해. 인생은 짧아!” 이제 아들은 제 인생의 캡틴이 될 일만 남았다.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 작성일 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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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데 나이가 어딨어, 영화 < 딜쿠샤 >

[칼럼] 꿈꾸는데 나이가 어딨어, 영화 < 딜쿠샤 >

‘딜쿠샤(Dil kusha)’란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고풍스런 서양식 저택 이름에서 알려진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이라는 뜻이다. 아치형 창문에 붉은 벽돌로 이층을 지은 사람은 UPI 서울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그는 가택에 연금되었다가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재라도 한국 땅에 묻어달라”던 테일러는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육신을 눕혔다. 2006년 공중파를 통해 방영한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나라>는 테일러의 극진한 한국 사랑을 담았다. 이 작품을 만든 김태영 감독이 이번에 연출과 각본, 출연과 제작을 도맡은 영화 <딜쿠샤>를 선보인다. 처음 제목은 '58개띠 몽상기 딜쿠샤'였다. 58세 중늙은이가 아니고 팔팔한 노총각이라 주장하는 사내가 꾸는 신나고 흐뭇한 꿈. ? 다큐멘터리 제작사 ‘인디컴’을 운영하던 청년 김태영의 나날은 종횡무진,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고엽제 참상을 고발한 <베트남전쟁, 그 후 17년>, 방문 자체가 기적이었던 쿠바 탐방기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 6대륙 30여개 나라를 누비며 완성한 <세계영화기행>, 20부로 꾸민 환경 다큐멘터리 <생명시대> 등 그가 매만진 작품들은 시청자들의 환호와 경각심을 끌어냈다. 방송 다큐멘터리 70편 연출에 온갖 트로피를 거머쥔 김태영을 두고 어느 매체는 ‘다큐의 정상을 정복한 문화독립군’이라 평가했다. 문화독립군은 기록영화에서 실험영화와 단편영화를 거쳐 극영화로 행보를 넓혀갔다. 남들이 외면한 '5월 광주'를 두 번이나 파고들었으며, 가상의 역사극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는 제작자로 참여해 본전치기를 했다. 다음 작품은 오래도록 야심차게 준비한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 <미스터 레이디>. ? ▲ 스틸사진 무모한 도전인가, 시대를 앞선 것인가. <미스터 레이디>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으로 뽑힐 만큼 이야기와 구성이 독특하고 탄탄했다. 안성기와 소찬휘가 각각 앵벌이 두목과 성전환을 한 종갓집 장손을 연기하고 박칼린이 음악 감독을 맡아 잔치판 벌이듯 찍기 시작했지만, 절반을 겨우 넘긴 상태에서 촬영은 제동이 걸렸다. 집 저당과 사채 당겨쓰기 전문가로 뱃심을 키워 온 김태영도 ‘깨진 독에 물 붓기’식 투자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 수밖에. 돈벼락을 시리즈로 맞는다 해도 촬영을 재개할 수 없는 건 아역 배우 녀석이 훌쩍 커버렸기 때문이다. 파산에 이어진 뇌출혈. 출근길에 쓰러져 사흘 뒤에 깨어난 김태영은 몸의 반쪽만 건졌다. 전래 괴담에나 있음직한 사건도 뒤따랐다. 형제처럼 지내던 <미스터 레이디>의 감독 조명남이 불치병을 앓다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딜쿠샤>에는 그런 김태영의 기구한 영화 인생이 회고조로 툭툭 던져진다. ? 영화에 미친 남자와 이웃들의 이야기치고는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문을 두드리라. 열리 것이니”라는 성경 한 구절이 뜨고 별 시답잖은 마술이 꼬리를 문다. 중년 남자가 어린 소녀와 함께 하늘을 날고 광화문의 해태상도 튀어 오른다. 그뿐 아니다. 불길에 휘감긴 절벽을 위태롭게 건너는 남자의 엉덩이에서 지폐가 빠져나가고, 경복궁 자경전 벽의 부조에서 십장생들이 튀어나오며, 거실에 걸린 액자에서는 반쯤 벗은 여자가 요염한 몸짓으로 남자를 홀린다. 실물로 더러는 애니메이션으로 잡힌 남자는 김태영이다. 고궁으로 발길을 옮기면 훨씬 더 괴이쩍은 장면이 기다린다. 고종을 비롯한 마지막 조선 왕족들이 출몰해 비운의 역사를 멋대로 비틀어 뒤집는 것이다. 황제 직속으로 설립한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에 난데없이 배우 장동건을 끼워 넣더니 1인 2역의 명성황후를 불러내 21세기 노총각의 연정을 쏟아낸다. 한국영화 역사를 통틀어도 이토록 생뚱맞은 설정이 없었다. 당황할 관객들에게 김태영은 정보를 퍼뜨려도 괜찮으니 상상놀이를 마음껏 즐기라고 주문한다. ? ▲ 스틸사진 <딜쿠샤>는 어떤 장르로 규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야기를 간추리기도 쉽지 않다. 현실과 허구, 실사와 삽화, 판타지를 뒤섞고 시공간을 수시로 옮기며 때로는 재연 드라마 형식을 펼치기 때문이다. ‘몽상가의 짬뽕 프로젝트’라는 김태영의 표현이 그럴싸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식의 상황이 짜증나기보다는 뛰어들어 훈수를 두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김태영과 인연을 맺은 이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딜쿠샤에 쪽방처럼 눌러앉아 트로트 가락을 구성지게 뽑아내는 여자는 음반을 두 장이나 낸 가수이다. 파출부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녀의 음원 수입 57원은 도대체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 궁금하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록밴드의 드러머로 오빠 부대를 거느렸던 아저씨는 부동산 중계업자가 되어 아픈 아내에게 신곡을 선물하려 머리를 쥐어짠다. 시력을 잃어가는 연극 연출가와 앞을 못 보는 어린 연인의 사랑엔 목젖이 뜨거워진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내내 마음을 흔든다. ? 울다 보면 눈물샘이 사라지는가. 병원에서 눈물샘을 복원 수술한 김태영이 굳어진 육신을 맹렬하게 괴롭힌다. 너 살고 나도 살자는 전투.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가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정호승의 시 <산산조각>에서).” 김태영이 이 구절을 즐겨 암송하는 걸 보면 달관의 경지는 아니어도 마음을 비웠다는 사실 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반찬 없는 식탁의 슬픔은 없다. 달걀을 깨고 간장으로 비빈 밥 한 덩어리를 사흘 굶은 머슴처럼 삼키는 장면은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강렬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시골 학교에서 안성기가 조심조심 벗겨먹는 뜨거운 감자,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친구 집에 들른 배두나가 오물오물 먹는 찐만두와 함께 한국영화 3대 메뉴이자 시식 장면으로 꼽아야겠다. ? 비극은, 고통을 당하는 이의 마음에 있지 않고 보는 이의 눈에 있다고 했다. 자칫 넋두리나 탄식으로 채워질 수 있었지만 화면은 끝까지 밝고 활기차다. 상처받고 떠밀리고 부대껴도 긍정의 에너지를 간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전반부에 한 후배가 꿈꿀 나이는 지났다고 핀잔을 주자 김태영이 한마디 쏴붙인다. "꿈꾸는 데 나이가 어딨어!" 삼포, 오포를 거쳐 이젠 일곱 가지를 포기한다는 ‘칠포 세대’까지 등장했다. 연애, 결혼, 출산,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깡그리 포기한다는 선언이다. <딜쿠샤>가 우울한 시대의 허약한 청춘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김태영이 밤낮으로 꿈꾸기를. 근육도 정신도 팔팔한 영화독립군으로 거듭나기를.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 작성일 20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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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자, 다시 젖지 않기를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칼럼] 젖은 자, 다시 젖지 않기를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본디 제목은 중국 가수 등려군의 노래에서 따온 ‘바다보다도 더 깊은’이지만, 주제를 헤아려 붙인 우리말 제목 <태풍이 지나가고>도 어울린다. 사노라면 어쩔 도리 없이 온몸으로 어둠과 폭풍우에 맞서야 할 때가 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혹독한 시간이었을지라도 돌이켜보면 감사할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일본 영화를 세계무대에 우뚝 세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작품마다 가족들의 크고 작은 상처를 싸매며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끌어낸다. 그가 이번에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꺼내들고 숨을 고른다. 일찍이 희극왕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영화의 중심에 놓인 료타의 고단한 삶도 보는 이들의 시선을 조절하게 한다. ? 허름한 연립주택, 늙은 어머니와 중년의 딸이 곧 불어 닥칠 태풍을 걱정한다. 얼마 전 가장의 장례를 치른 집안답지 않게 밝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어머니의 우스꽝스런 몸짓과 말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작자작 보글보글, 냄비에 담긴 곤약 조림과 쑥갓 튀김 우동. 도입부부터 고레에다 감독의 인장이 또렷하다.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늦은 밤 쓰레기로 채워진 집구석에 퍼질러 앉은 료타(아베 히로시)가 푸념한다. 한때는 문학상을 타고 소설까지 펴낸 촉망받는 작가였으나, 15년이 흐른 뒤의 삶은 망가져도 너무 망가졌다.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떠났으며 본업은 문화 건달이요 부업은 사립 탐정이다. 말이 좋아 탐정이지 불륜 현장을 몰래 찍어 수수료를 챙기거나 집 나간 강아지와 고양이를 찾아주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신세다. 홀아비풍 문화 건달은 자신이 ‘대기만성형’이라며 가족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 혈연이나 혼인으로 료타와 족보를 이룬 인물들 모습에서 사자성어 ‘부전자전(父傳子傳)’과 ‘부자유친(父子有親)’, 이심각체(二心各體)가 떠오른다. 부전자전이란 흔히 바람직한 성격이나 습관이 전해지는 걸 뜻하지만, 료타와 아버지의 관계처럼 달갑지 않거나 비아냥거릴 때 쓰이기도 한다. 료타의 아버지가 남긴 것은 복권 몇 장과 돈을 차용한 전당표 뭉치. 생전의 흔적을 이보다 더 확연히 보여주는 유품이 또 있을까. 료타는 아버지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돈벌이에 무능하고 가족에게는 소홀하고 한탕주의에 빠져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닮아갔다. 경륜 도박장의 바퀴 소리를 들어야 살아있음을 실감한다는 료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요행수와 역동성의 대물림이라니. 부자유친,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친애의 정은 료타와 싱고(요시자와 타이요)에게서 넘쳐난다. 철부지 어른과 애늙은이의 정겹고 끈끈한 유대감으로도 비친다. 료타는 전처 쿄코 (마키 요코)에게 맡겨진 싱고를 한 달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다. 이제는 양육비도 밀린 형편이기에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철딱서니 없는 어른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지만, 껑충하고 싱겁고 추레한 이 남자는 야릇하게도 연민을 자극한다. 쌈짓돈을 풀고 잔머리를 굴린 료타가 싱고에게 비싼 운동화를 안겨주는 과정은 그래서 더 우습고 슬프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에서 보기 드문 유머들이 팝콘 터지듯 터진다. 어딘지 허술하고 엉뚱한 상황이 재밌거니와 대사도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아버지의 코를 물려받아 돈 냄새를 잘 맡는 료타가 다락 침투 작전에서 낭패를 보는 대목에 이르면 웃다가 자지러질 지경이다. ? 현대를 사는 부부에겐 일심동체보다 이심각체의 삶이 필요한 건가. 료타와 쿄코는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 것 같지는 않다. 두 사람은 법적으론 완전히 정리한 사이지만 료타는 완벽히 갈라서기가 쉽지 않다. “같이 살 때 잘하지 그랬어.” 쿄코는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고픈 료타의 속을 뒤집는다. 비정, 매정, 무정. 무능한 가장의 자업자득치고는 너무 모질다. 태풍이 몰려오자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생각지 않게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에 경계심마저 감돈다. 깊게 파이고 갈라진 사이를 추억과 속삭임으로 메울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어떤 사람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일본에선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고독사’가 해마다 수만 건씩 일어난다. 홀로 백골이 된 이의 뒷수습을 대신할 보험이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가족을 대신해 고인의 유품을 처분하는 직업까지 생겼다. 이 영화도 고령화율 세계 1위의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슬쩍 건드린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고독사한 주민 소식과 실종된 노인을 찾는 목소리를 키우더니 노인들이 모인 음악 감상회에서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튼다. <마지막 4중주>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제2바이올린 주자로 연주하던 곡이다. 강사는 베토벤이 말년에 발표한 걸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노인들을 격려하고 부추긴다. 황혼기의 내리사랑, 어질고 너그럽고 때로는 능청스럽게 가족 하나하나를 보듬는 키키 키린의 연기가 좋다. 내면의 폭풍이었을까. 거세게 몰아치는 사건이나 극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료타가 의뢰받은 외도 현장을 쫓아다니는 장면들은 새롭지도 않거니와 판에 박힌 형식이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전 작품들에 견줘 무게감은 덜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통찰력과 온기는 결말부의 전당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명치끝이 아리도록 뻐근하다. 우리 나그네 삶을 들락날락하는 희비극이리라. 료타의 마지막 뒷모습에 깔리는 <심호흡>의 노랫말이 여운을 남긴다. 료타의 앞날은 쾌청해질 수 있을까.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시인은 읊었다. 흠뻑 젖었다면 마를 일만 남지 않겠는가. 그러니 물기를 털어내고 위를 보며 걸을 일이다. ? 글.영화평론가_ 박평식 *홍보용 스틸사진을 활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작성일 201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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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 경계 >

[칼럼] 국경 없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 경계 >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다. 명사로는 문서를 말하고 동사로는 기록한다는 뜻의 'document'에서 나온 다큐멘터리(Documentary)는 꾸며낸 허구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룬다. 1895년 영화의 탄생을 알린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도 일종의 다큐멘터리였다. 관객이 놀라서 도망칠 만큼 살아 움직이는 물체를 필름에 새겼기 때문이다. 1922년 캐나다 북단 에스키모 가족의 일상을 담은 <북극의 나누크>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시대와 사회가 암울하고 흉포할수록 더 날카롭게 칼날을 벼린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되살린 <밤과 안개>와 <쇼아>, 1960년대 인도네시아 군부의 대학살을 기억으로 재연한 <액트 오브 킬링>. 이 작품들이 안겨준 충격을 묘사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야만, 악귀, 전율, 경악, 환멸 등 어떤 표현도 진부하니까. 역사와 문화, 환경과 자연은 물론 개인사까지 다루는 걸 보면 바야흐로 다큐멘터리 전성시대이다. 하지만 관광 안내나 맛집 소개처럼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면 다큐멘터리에 포함하긴 어렵다.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기록해 전달하는 자의 현실 인식에 있다. 다큐멘터리를 ‘사실(fact)’을 모으는 행위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큐멘터리 이론을 창시한 영국의 존 그리어슨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현실의 창조적인 묘사’라 정의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되 연출자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시대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자세로 접근할 것인가. 국적이 다른 세 감독이 힘을 합친 <경계>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엿보인다. 세르비아 출신 블라디미르 토도로비치와 인도네시아의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한국의 문정현 감독이 세계 곳곳의 이주민들을 통해 난민과 내전, 종교와 정치, 분단과 노동, 인종과 빈부 차이 등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 ? 감독들이 편지로 안부를 묻는 형식으로 8개 나라를 넘나든다. 이주민들이 떠나온 계기는 다양하지만 추방과 소외, 마모되는 삶의 형태는 비슷하다. 세 나라를 선택한 루디 감독은 먼저 도쿄에서 일본인과 결혼한 자카르타 출신 여성 누리의 일상을 보여준다. 음식과 민족 정체성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는가. 인도네시아 고유 음식 ‘템페’를 잊지 않은 그녀 모습에 던지는 질문이다. 인도네시아 갈랑 섬의 난민촌. 바다에서 떠돌다 살아남은 25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머물렀던 이곳은 폐허로 변했다. 폭격을 맞은 듯한 건물과 녹슨 내장을 드러낸 자동차, 을씨년스런 묘지는 떠도는 이들의 처지와 맞물린다. 한국의 상록수 부대가 주둔했던 동티모르. 1977년 인도네시아에 강제로 귀속된 동티모르는 유혈 탄압을 딛고 25년 만에 독립했지만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카메라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를 가르는 '모타 아인' 다리를 시대의 철벽으로 느끼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블라디미르 감독은 동남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오간다.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모여든 아시아 노동자들이 한때 120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놀랍다. 화면은 공사장에 모인 노동자들의 고단한 표정에서 하노이의 전쟁기념관으로 바뀐다. 두 차례의 기나긴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미국에 열패감을 안겨준 저력은 어디서 온 걸까. 참수당한 베트남인들의 모습, 갖가지 모양의 차꼬에 갇힌 남녀와 고문으로 짓이겨진 얼굴들, 격려하고 선동하는 호찌민의 편지가 그 근거를 밝힌다.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펜타곤 계단에서 분신자살한 미국 청년 노먼 모리슨의 흑백 영상도 증언한다. 거리에서 구두닦이 사내의 접착제 한 방울로 웃음을 끌어낸 블라디미르는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 조국의 역사에 한숨을 쉰다. 베오그라드 왕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으로 다시 신유고연방을 거쳐 몬테그로와 코소보 분리까지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데, 보스니아 내전의 '인종청소'에 이르면 머리칼이 곤두선다. ? ? 문정현 감독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세 번이나 방문할 만큼 영화에 공을 들였다. ‘아프리카의 유럽’이자 희망봉으로 유명한 케이프타운은 온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하다. 게다가 인종차별도 심한 곳이어서 이민자들 대다수가 보금자리였던 ‘디스트릭트6’에서 쫓겨나야 했다. 떠도는 그들 모습에 한국의 철거민 투쟁 현장을 얹은 카메라는 흥겨운 춤판으로 이동한다. 디스트릭트6 공동체 생활을 추억하는 이들의 새해 축제이다. 문정현이 13년에 걸쳐 인연을 맺은 한 이민자 가정을 보노라면 드라마가 따로 없다. 짧은 행복에 긴 불행, 인생유전이다. 영화 <할매꽃>에서 가족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들춰낸 문정현은 다시 자신의 족보를 펼친다. 삼촌은 재일조선인. 그래서 국적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족. 북한에 있는 여동생의 장례를 치른 뒤에야 한국 국적을 획득한 삼촌은 65년 만에 한국 땅을 밟는다. 감회에 젖지만 조카와 약속한 북한 방문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 ? 지금 세계의 눈길은 난민과 이민자 문제에 쏠려 있다. 수백만 명의 난민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자 유럽 여러 나라는 인류애와 자국의 이익을 두고 갈등한다. 난민은 궁핍하지만 부랑자가 아니며 잠재적 테러리스트는 더욱 아니다. 누구보다도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다. 다큐멘터리스트 세 명의 부르튼 발로 완성한 <경계>는 결말부에 부지런한 세르비아 청년을 내세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버려진 표지판 조각들로 배를 만들고 있다. 숨 가쁘게 내리치는 망치질에서 경계를 허물어 내달리고 싶은 열망이 느껴진다. 계속해 몸을 뒤집는 강물을 오래도록 잡아내며 화면이 닫힌다. 흘러가는 게 강물뿐이랴. 역사도 삶도 흥망성쇠도 흘러가는 것을. 영화의 광고 문안이 살갑게 다가온다. <킬링 필드>의 엔딩에 흐르던 존 레논의 <이매진>의 노랫말이다. “상상해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삶을 사는 것을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 *홍보용 스틸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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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인간사와 유럽 예술의 궤적... 영화 <프랑코포니아>

[칼럼] 루브르, 인간사와 유럽 예술의 궤적... 영화 <프랑코포니...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곳이 <모나리자> 앞이라면, 제일 큰 그림은 맞은편에 걸린 <가나의 혼인 잔치>로 화폭 크기가 세계 최고이며 무게는 액자를 포함해 1톤에 이른다. 두 작품 모두 이탈리아 출생이지만 파리로 이주하는 과정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올바른 유통 경로를 거친 반면 다른 하나는 무력으로 탈취한 것이다.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의 <프랑코포니아(Francofonia)>는 르네상스를 수놓은 이 걸작 회화들을 비롯해 온 나라가 탐내는 미술품을 줄줄이 선보인다. 눈이 호강할 정도로 풍성하나 빛보다는 그림자에 주목하며 숨겨진 얘기에는 관심이 없다. ‘유럽 예술의 궤적’이라 일컫는 루브르 역사를 통해 국가와 권력, 예술의 관계를 탐구한다. ? 독일군에 점령당한 1940년 파리. ‘예술보호부대’를 창설한 나치는 루브르를 접수하려 나선다.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 미술관을 세우려는 수집광 히틀러에겐 루브르야말로 최상의 전리품이었다. 루브르가 깡그리 털릴 위기에 놓이자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댄다. 루브르 박물관 관장 자크 조자르와 나치군 장교 메테르니히 백작. 적으로 만났지만 둘은 미술품들을 지켜낼 묘수를 짜내야 한다. 그렇다면 감추는 쪽과 찾는 쪽의 숨 막히는 신경전이 펼쳐져야할 터인데 영화는 담담하다 못해 고요할 지경이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무너지고 대사는 네 가지 언어가 뒤섞여 돌아간다. 당혹스러울 지도 모르니 소쿠로프 감독의 이력부터 짚어볼 일이다. ? 죽음을 사색하는 영상시인, 이미지의 연금술사. 화면에 영혼을 머물게 하는 현자. 초월적 스타일의 계승자. 현존하는 감독을 향한 이토록 존경어린 헌사가 또 있을까. 시리도록 쓸쓸한 가족 풍경화 <어머니와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 괴테도 까무러칠 만큼 원작을 기괴하게 뒤튼 <파우스트> 등 소쿠로프 작품 목록을 두고 예술성과 상업성, 오락성을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느끼고 이해하려는 마음 하나로 다가가야 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탐방기 <러시아 방주>를 본 사람이라면 진기한 체험을 했을 터이다. 90분 동안 단 하나의 쇼트로 250년에 걸친 역사와 인물의 영속성을 확인하는 코스였으니까. 두 번째 박물관 기행 <프랑코포니아>에서 소쿠로프의 어법은 여전히 묵직하지만 필치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 “바다와 역사의 자연적 힘에는 지각도 연민도 없다.” 폭풍우에 갇힌 화물선과 교신하려 애쓰는 남자 그리고 시신처럼 깊이 잠든 안톤 체호프. 풍전등화에 처한 루브르의 형상화로 보인다. 파리를 장악한 히틀러의 만족스런 표정을 비롯해 나치들이 찍은 흑백 필름이며 관련 사진과 미술품, 스케치와 도면 등 갖가지 시각 자료로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화면 의 크기도 제각각이고 두서없이 이어가기 때문에 한 눈 팔면 중요한 대목을 놓칠 수 있다. 예를 들면, 흑백 정사진에 세피아 색조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연결한 다음 두 배우가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대목은 컬러로 전환해 붙이는 식이다. 컬러 영상 한쪽 면에 파동처럼 새긴 스크래치는 생중계의 착시 효과를 낸다. 테크닉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역사와 시간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려고 의도한 반칙이다. ? 루브르 변천사는, 삽을 뜬 16세기말부터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로 단장한 1989년까지 소묘하듯 소개한다. 조자르와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는 건 감독이 국가와 권력, 역사에 자주 눈길을 돌리기 때문이다. 나치즘을 묵과한 페탱의 비시 정부를 꼬집더니 볼셰비즘과 혁명, 전쟁의 광기에 탄식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공통점이 많았다. 약탈의 제왕이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파멸을 자초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러시아 침공은 인류역사에서 최대의 실수로 꼽힌다. 혹한의 레닌그라드 거리에 나뒹구는 주검들에 겹치는 누군가의 일기. “강가를 걷다 동사한 여자와 아이를 봤다. 다음날 아이는 사라졌다. 먹힌 것 같다. 여자의 다리도 없었다.” 프랑스적인 혼재와 성찰인가. 유령으로 출몰하는 나폴레옹과 마리안느가 제목 '프랑코포니아'의 의미를 흩뿌린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탄생한 마리안느는 숱한 흉상과 우표, 와인의 은박 덮개에 새겨질 정도로 친숙한 얼굴이다. 프랑스는 그녀를 자유와 이성의 알레고리로 사용한다. 끊임없이 자유, 평등, 박애를 뇌까리는 그녀 앞에서 나폴레옹이 거들먹거린다. “작품의 기원은 전 세계이지만 어디에 놓일지는 오로지 전쟁이 결정하지.” 나폴레옹이 탈취한 작품들은 유럽 예술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엄청난 컬렉션이었다. 나폴레옹이 죽은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조선의 보물들을 불태우거나 노략질했다. ? 소쿠로프 감독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는다. 국가와 예술의 목표는 일치하지 않는 걸 알거니와 약탈 행위를 눈감아 줄 수도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해설자로 때로는 관망자로 때로는 순례자로 회랑을 거닌다. 루브르를 지켜낸 두 사람의 훗날을 알려주는 수법이 재밌다.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한 <프랑코포니아>는 예술철학 에세이를 쓰듯 마무리한다. “박물관들은 때론 권력과 인간의 추악한 행위를 덮어준다.” “루브르의 모든 작품은 인간의 투쟁, 사랑, 살인, 회개, 죽음, 비명을 담고 있다.” 강화도의 불길을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지만 그래도 루브르가 부럽다. 스크린의 현자를 보유한 영화계는 더 부럽고. ? 글.박평식(영화평론가) ? *스틸이미지는 포털에 공개된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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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가 자유롭게 하리니, 영화 <히어 애프터>

[칼럼] 용서가 자유롭게 하리니, 영화 <히어 애프터>

“ ...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도고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이진명의 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에서. ? 요즈음 유럽에서 만든 영화는 대부분 다국적 합작품이다. <히어 애프터(The Here After)>도 스웨덴 영화인들이 프랑스와 폴란드 자본을 끌어들여 완성했다. 옆으로 누워 몽롱한 눈길을 보내는 소년 얼굴로 채운 포스터가 예사롭지 않다. 스웨덴어 제목 ‘Efterskalv’는 여진 (餘震)을 뜻하니 진앙이며 후폭풍, 매몰 같은 으스스한 용어와 상황이 떠오른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기에 다시금 술렁이며 흔들리는 걸까.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2년 전에 욘이라는 17살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으며, 그가 돌아오기 무섭게 마을엔 사건의 여파가 거세게 밀려온다. 중요한 정보를 누설해도 나무랄 수 없는 건 원인을 캐기보다 파장과 반응에 초점을 맞춰 나가기 때문이다. ? 화면이 열리면 어둑어둑한 방. 가방에 옷가지를 넣는 욘(율리크 먼더)을 한 여성이 포옹하며 속삭인다. "다 괜찮을 거야." 밖으로 나오기까지 욘은 이중 삼중으로 잠긴 문을 거치는데, 암시만 할 뿐 사건을 설명하지 않으며 으레 나올 법한 회상 장면도 비치지 않는다. 중반에 이르면 질투가 빚어낸 우발적 범죄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아버지(매츠 브롬그렌)는 욘이 안전띠 매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자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혼쭐을 낸다. 아비와 자식의 성격을 동작 하나로 처리하듯 상황이나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대목이 많다. 슬쩍슬쩍 귀띔할 테니 알아서 챙기라는 주문이겠다. ? ? 욘에게 가정은 숙박소와 별로 다르지 않다. 눈치 빠른 말썽꾸러기 동생과 치매가 깊어진 할아버지, 폭군은 아니지만 가족을 다독이기보다 다그치기에 바쁜 아버지. 식사할 때도 의견을 나누기는커녕 서로 퉁명스럽게 말대꾸만 한다. 병들었다는 이유로 손자가 아끼는 개를 끔찍하게 처리하는 할아버지의 액션은 격투기 선수를 뺨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줄 놓은 아버지를 내치는 아들의 태도를 눈감아 줄 수는 없다. 어머니이자 아내, 며느리로서 여성성이 사라진 가정이라는 점은 헤아려 볼 만하다. 슈퍼마켓에서 어느 여인이 욘을 쓰러뜨려 목을 조른다. 그렇게 딱 한 번 살벌하게 나뒹군 두 사람은 결말부에 가서야 다시 맞닥뜨린다. ? 세계 최고의 사회 복지 시스템과 옴부즈맨 제도, 합의 문화. 스웨덴을 북유럽의 낙원이라 일컫는 이유이지만, 매그너스 본 혼 감독은 낙원에는 관심이 없고 증오심이 휘도는 학교 안팎에 집중한다. 증오는 가장 오래 지속되는 쾌락이라고 했다. 공동의 증오는 쾌락에 단결심을 얹게 마련이다. 따돌림은 기본이고 주먹질을 거쳐 몽둥이를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드는 등 아이들은 흉포하다. 죄도 밉지만 인간은 더 밉다는 투로 욘을 짓이긴다.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일 대 일의 관계에서 나온 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피해를 당하거나 고통을 겪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욘을 응징하려 든다. ? ? 증오의 족보에 오른 날선 감정들이 타인의 상처를 덧내며 극단으로 치닫는다.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는 불의와 불평등, 압제 같은 공공의 분노에만 적용될 터이다. 그렇다면 욘을 에워싼 사람들의 분노와 공격은 정당한가. 욘은 공공의 적도 아닐 뿐더러 앙갚음할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죗값을 치른 약자를 겨냥한 분노라면 비열하고 이기적인 화풀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살인자를 데리고 썩 꺼져!” 아이들은 이제 욘의 가정까지 흔들어 위협한다. 적개심은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욘을 제 자식 망치는 악성 바이러스로 판단한 학부모들은 바이러스 축출에 힘을 모은다. ? 슈퍼마켓 내부와 통학 버스를 따라잡는 들판에서 수평으로 이동할 뿐 카메라는 요동치지 않는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묵직하고 차분하게 마음의 심층을 후빈다. 긴장감 때문인지 유머가 없는 게 아쉽지만, 북유럽 특유의 시리도록 축축한 풍광은 드라마의 결을 잘 살린다. 아버지의 후회와 탄식, 유일하게 온기를 나눈 여자 친구의 외면. 욘에게 과거란 현재를 옥죄는 형틀이자 덫이었다. 탄알을 장전하는 손과 살의로 번득이는 표정. 욘이 새벽을 가르며 어느 집에 들이닥치면 화면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다. 매섭게 몰아친 여진은 그칠 것인가. 부드럽고 세심한 손길로 가슴 뻐근하게 요약하고 전망하는 엔딩. 그래, 용서가 자유롭게 하리라. 규모는 작아도 울림이 큰 영화이다. ? 글. 박평식(영화평론가)

  • 작성일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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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무비테라피] 아버지의 자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먼 당신? 요즘 아버지의 역할과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과거에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찍이 떨어져서 바깥일을 관장하는 존재로써 무심하고 과묵한 이미지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보다 더 크고 가까운 존재로써 자녀들과 친밀한 상호작용의 대상으로써 아버지의 모습이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풀렸을 뿐 아니라 아버지 자리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려운 대상이고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짊어지고 있는 아버지들에게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무겁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는 그런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 담긴 영화다. 영화는 ‘바뀐 아이’라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낳은 아이와 기른 아이로 연결된 두 개의 가정 속 두 명의 아빠의 고민과 선택을 다루며 진정한 아버지의 의미를 묻고 있다. ? 두 명의 아버지, 두 개의 사랑 방식? 주인공 료타는 바쁘고 능력 있는 부자 아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의 아들인 케이타를 사랑하는 방식은 좋은 아파트, 외제차, 최고의 교육과 같은 환경적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6년 전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들로 알고 있던 케이타가 사실은 그의 친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첫 마디는 ‘역시 그랬군’이다. 자신만큼 승부근성이 강하지 않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말이다. ? ? 병원의 주선으로 친아들 류세이를 키우고 있는 사이키 가족을 만나면서 그의 고민은 시작된다. 아이들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바로 아이들을 바꾸기에는 지난 6년간의 시간들과 아이들이 받을 충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로 대비되는 그의 고민과 함께 영화는 우리에게 두 명의 대조적인 아빠 상을 비춰준다. 부자 아빠이지만 가족과 보낼 시간이 없는 료타와는 달리, 시간부자이자 마음부자인 아빠 유다이의 모습은 ‘어떤 아들이냐’는 물론 ‘어떤 아버지이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 료타가 장난감이 고장 나면 새 장난감을 사주는 아빠라면 유다이는 장난감을 같이 고치는 아빠다. 또한 료타가 아이의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목욕도 스스로, 잠도 혼자 스스로하기를 강조하고 이런저런 규칙과 성취 목표를 세워줌으로써 아이를 양육하는 아빠였다면 유다이는 친밀감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목욕하고 겹쳐져 잠자고, 경직되기 쉬운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에 주력하는 아빠였다. 그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상반된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 아빠들이었던 것이다. ? 처음에 료타는 능력도 없어 보이고 규칙성도 없는 유다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래서 돈으로 보상하고 두 아이를 모두 자신이 키울 생각을 할 정도로 자신의 방식에 확신을 가진다. 하지만 료타의 집에서 살게 된 류세이가 가출을 하면서 그는 같은 경험을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그 때 느꼈던 자신의 결핍감과 공허감, 이런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성취에 더욱더 집중하면서 보낸 지난날을 돌아보고 류세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히 케이타가 자고 있는 자신을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을 향한 케이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고 자신이 누구의 아버지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케이타의 진짜 아버지가 된 것이다. ? ? 결국 영화는 혈육이라는 낳은 정을 능가하는 기른 정에 손을 들어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나누는 시간이며 핏줄의 연을 능가하는 시간과 마음으로 연결된 관계의 연이 가진 끈끈함이 있다는 것이다. ? 그렇게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는 쉽게 모성과 부성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 모성도 부성도 아이의 탄생과 함께 단번에 생기는 마음은 아니다. 많은 엄마들이 단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모성이 저절로 샘솟는 것이 아님을 증언한다. 그보다는 함께 부대끼고 시행착오를 경험한 끝에 몸의 체험이자 마음의 체험으로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고, 그렇게 쌓인 시간과 감정의 층위에 내가 너의 엄마이고 네가 나의 아이임을, 우리가 서로 이렇게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찡하게 느끼는 과정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모성은 깊어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사이에 흐르는 연결감과 사랑은 세상의 모든 분열과 단절의 상처를 초월하는 힘이 된다. 모성은 마음의 고향이 되고 세상 모든 것이 나를 거부해도 나를 품어주는 누군가가 내 뒤에 있다는 마음의 빽이 되는 것이다. ? 부성 역시 처음부터 저절로 샘솟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이와 한 몸이었다가 마음으로 다시금 연결되는 어머니의 모성과는 달리, 아버지들은 처음에는 낯설고 여린 존재로 아이를 받아 안을 가능성이 크다. 아내가 낳은 아이를 안아든 아버지들은 어색하고 서툴게 아이와 첫 만남을 한 뒤, 아이가 서너 살이 된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아빠’하고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호명을 한 이후에야 자신이 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부성은 모성보다도 더 많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지로써의 책임감은 곁에서 생활을 지켜보고 시간을 함께 할 여유보다는 가정에서 벗어나 가정에 필요한 자원을 끌어오는 역할을 요구하는 측면까지 포함한다. 아빠들은 마음만큼 많은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은 구조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부성에는 표현이 서툴고 타이밍이 어긋나는 지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시간을 함께 쌓아가는 경험을 통해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로 거듭나게 된다. ? ? 영화 중간에 유다이가 아이에게 시간을 내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료타를 나무라며 아이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라고 종용한다. 료타는 유다이의 질책에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 있어서요.”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료타의 말에 유다이는 ‘나 아니면 안 되는 일’ 많은 일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짚어준다. 그리고 유다이의 말은 대체 불가능한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이 영화를 관통하는 답을 보여준다. ?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하는 거죠.” ?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며 자신도 점점 더 어머니다운 어머니로,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어머니 자리에 굳건히 자리 잡는 것처럼, 아버지 역시 처음부터 아버지였던 아버지는 없다. 진짜 아버지를 만든 것은 함께 한 시간, 그 시간 속 나눈 마음이다. ? 글. 선안남(상담심리학자)

  • 작성일 201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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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념, 나의 선택..영화 <헝거>

[칼럼] 나의 신념, 나의 선택..영화 <헝거>

어떤 그림이나 소리도 나오지 않는 까만 화면에 뜨는 첫 자막. “1981년 북아일랜드. 1969년 이후 분쟁 중 2187명이 희생되었다.” 스티브 매퀸 감독의 <헝거(Hunger)>를 폭넓게 이해하려면 북아일랜드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땅과 집은 내 소유이지만 문패와 주소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재된 경우일까.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섬 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데도 아일랜드령(領)이 아니고 영국령에 속한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함께 북아일랜드는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을 이뤘는데 그 과정은 더 없이 복잡하고 격렬했다. “분열시키고 지배하라”는 로마 속담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도 신교도가 장악한 북부 지역은 여전히 영국 관할로 남았고, 구교도는 참정권을 비롯한 온갖 정책에서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북아일랜드 분쟁 요인을 민족과 종교의 이질성에서 찾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을 조직한 과격파 구교도들은 압제와 불평등에 테러로 맞섰다. 세계 3대 영화제의 대상을 번갈아 챙긴 <마이클 콜린스>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블러디 선데이>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모두 내전과 IRA에 얽힌 비극을 통하여 폭력의 정당성을 따진다. <헝거>는 그 분쟁의 한 복판에서 처절하게 야위어간 남자 이야기다. 이름은 보비 샌즈(1954~1981). ? 무대는 북아일랜드 메이즈 교도소. 불안하고 고달픈 교도관의 일상부터 보여준다. 출근길엔 자동차에 폭탄이 설치되었는지 확인하고, 직장에 오면 갇힌 자들과 몸싸움을 벌여야 하며, 퇴근해서는 벌겋게 부은 손을 식혀야 하는 신세다. 구속된 IRA 조직원들은 자신들을 정치범으로 인정하질 않는 영국 정부에 기이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죄수복 대신 담요를 걸치거나 몸을 씻질 않으며 소변은 복도로 흘려보낸다. 감방을 쓰레기로 채우면서 썩힌 음식물과 배설물로 벽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들을 이끌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는 수감자들이 한숨을 고를 즈음에야 나타난다. 권총을 소지한 죄목으로 3년간 옥살이한 보비는 다시 테러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다. ? 보비가 등장하자 경찰들은 포악하게 밀어붙인다. 수감자를 발가벗겨 끌고 나와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피멍든 알몸을 욕조에 처넣는다. 몽둥이로 각을 세우더니 “복날 개 패듯 팬다”는 우리 속담도 실행한다. 겁에 질린 애송이 경찰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로 비친다. 수감자들에겐 인간으로서 존엄성은커녕 어떤 자율성도 주어지지 않는다. 소독약에 깎이는 분뇨 벽화를 클로즈업한 대목에서는 퀴퀴한 그들의 처지가 겹친다. IRA 대원들의 정치범 지위를 박탈한 마거릿 대처 수상의 위세는 화면 밖 소리로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 살인과 폭력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고 형사상의 살인과 폭력만 존재할 뿐이다.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카랑카랑한 쇳소리. ? ? 이윽고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는 보비. 이제 신체는 비장한 무기이자 전쟁터가 된다. 결행을 앞둔 보비가 도미니크 신부(리암 커닝햄)를 찾는다. 카메라는 면회실 탁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옆모습을 고정된 자리에서 16분 동안이나 길게 찍는다. 심오한 주제에 연기가 조화를 이룬다면 이 롱테이크 기법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 다시 말해 영화의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 자신을 ‘영혼 사업가’라 우스개를 던진 도미니크는 보비의 추진력과 통솔력을 칭찬하는 등 관록의 사제답게 기선을 제압한다. 너무 많은 동의는 대화를 죽인다고 했다. 잡담에서 시작한 대화는 진지한 토론이자 팽팽한 설전으로 이어진다. ? “동지의 희생이나 가족의 고통을 생각해봤나?” “역사에 남고 싶어 그러나?” “죽고 나면 삶을 알 기회가 없어.” “자유의 투사는 밖에서 묵묵히 자기 일하는 사람들이야.” “삶이 무모하면 죽어!” 타이르고 으름장을 놓는 도미니크 신부에게 보비는 야유를 곁들여 응수한다. “신부님이 낚시할 때 우린 시위 현장에 있었어요.” “저도 한계를 알아요. 다음 세대는 더욱 굳은 결의로 투쟁할 겁니다.” “자살 같겠지만 제겐 타살이에요.” “목숨과 자유 둘 다 중요하죠. 저는 제 삶을 존중해요.” 보비가 어릴 적 크로스컨트리 대회에서 겪은 ‘망아지 사건’은 확신과 결단, 무엇보다 실천하는 삶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수인과 사제는 대화의 폭을 넓혀가며 이따금 목청을 돋우는데, 붙박이 같은 카메라는 거리를 좁히지 않으며 얼굴 표정을 담을 생각도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어렵거니와 어느 편을 응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첫 영화를 찍는 스티브 매퀸 감독의 연출은 정교하면서 과감하다. 관조의 경지로 불러도 좋을 16분의 대화를 위해 이전의 모든 장면에서 대사를 절제하거나 배경 음악을 없앴고 더러는 음향으로 처리했다. 신부가 강론할 때 딴청을 부리는 수감자들 모습을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덮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면회실 장면을 두고 “40년 넘게 계속된 투쟁의 역사를 응축했다”는 외국 어느 언론의 평가는 과찬이 아니다. ? ? 제 몸의 모든 장기와 세포를 말려버리는 사내를 보는 건 고통스럽다. 살점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앙상한 뼈와 욕창으로 곪아가는 피부. 슬프다 못해 참혹한 육신이다. 그러나 ‘서서 죽겠노라’ 다짐한 듯 형형한 눈빛은 마이클 패스빈더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는다. 단식 66일째, 27세 노인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신음. 그리고 깊은 적막과 고요. 카메라는 보비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에 멈춰 선다. 활력으로 충만하고 다툼도 분노도 미움도 없는 시간이었다. 보비 샌즈가 내민 마지막 승부는 자기 파괴인가, 정치적 순교인가. 판단은 관객 저마다의 몫으로 남는다. 분명한 것은, 신념은 결코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권력이나 체제도. ? 글. 박평식(영화평론가) ? *홍보용 스틸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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