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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특별해요, 이겨내세요 / 영화 <돈 워리>

[칼럼] 당신은 특별해요, 이겨내세요 / 영화 <돈 워리>

영화 <돈 워리(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가 자신을 소개한다. “난 존 캘러핸이고 생모가 누군지 몰라요.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이에요.” 다양한 불행이라니, 세상 모든 고난을 떠맡은 듯한 처연함이 묻어나온다.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 포틀랜드에서 활동한 카투니스트 존 캘러핸 (1951~2010). 풍자만화 그리기가 본업이지만 음반을 낼 만큼 작곡과 노래에도 재능이 많았다. 영화 타이틀은 그가 펴낸 회고록과 카툰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캘러핸 작품은 얼핏 거칠고 잡스러워 보이지만 냉소와 해학으로 찌르고 비트는 유머 감각은 탁월했다. 그의 카툰이 신문과 잡지에 오를 때마다 독자들 평가는 열광 아니면 비난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국내에는 회고록이며 만화 모음집 등 캘러핸에 관한 서적은 출간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2007)과 몇몇 카툰은 유튜브에서 구경할 수는 있으니 다행스럽다. 구성에서 완성까지 <돈 워리>에 20여 년 세월을 쏟아부은 사람은 미국의 구스 반 산트 감독이다. ? ? 남들이 연습할 때 구스 반 산트는 실험한다. 첫 작품 <말라 노체>로 독립영화의 지평을 넓혔고 <드럭스토어 카우보이>와 <굿 윌 헌팅>,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 등 메이저와 비주류 영화판을 넘나들며 거둔 성과는 엄청났다. 변방을 떠도는 이들과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점도 기록해야겠다. 이제 그가 <투 다이 포> 이후 24년 만에 호아킨 피닉스와 호흡을 맞춘다. 풋내기에서 연기 도사가 된 배우와 늙수그레한 거장 감독이 재회한 <돈 워리>는 처음부터 기승전결 구성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존 캘러핸이 참석한 토크 모임과 강연장 두 곳을 오가며 현재와 과거를 뒤섞는다. 시공간이 널뛰듯 뛰어도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보다 집중력이 높은 건 매끄러운 편집 덕분이다. 실존 인물을 다룬 전기영화이며 과정이나 결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른바 인간 승리로 내딛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적절한 방법이다. 사건을 파고들기보다 주인공이 맞닥뜨린 고통과 변화에 중점을 둔다. 반 산트 감독이 즐겨 쓰는 롱테이크 기법에 클로즈업을 빈번하게 사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 존 캘러핸 (호아킨 피닉스)에게 숙취 없는 아침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일찍이 13살부터 술병을 딴 사내가 맨정신으로 아침을 맞았다면 변고가 아니겠나. 예상치 못한 기갈에 오장육부가 난동을 부리자 낮술로 대응한 존은 술고래 덱스터(잭 블랙)와 새벽까지 달린다. 결국 존의 몸뚱이는 휴지처럼 구겨진 자동차에 낀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는 소문난 술꾼답게 이죽거렸다. “알코올 중독자란 자기만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자다.” 바다보다 술이 더 많이 사람을 익사시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여기 중독자들은 저마다 푸념을 늘어놓는다. “술을 즐기며 혼돈을 만드는 것과 술에 의존해 혼돈을 만드는 건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뭔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익히 알고 있는 한 마디면 정리가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다음엔 술이 술을,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잃어버린 주말>(1945)과 <술과 장미의 나날>(1962)은 알코올 중독의 폐해를 소름이 돋도록 묘사한다. 거실 선반에 놓인 술을 바라만 봐야 하는 존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수영장 물 속에 가라앉으며 술을 마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없이 부러웠을 터이다. 황홀했던 음주의 추억을 6개 숏으로 붙인 뒤 판타지로 연결하는 대목은 재치가 넘친다. ? 유년의 트라우마가 키운 주량인가. 폭음과 좌절, 고통을 전투 치르듯 묘사하지만 영화는 동정할 생각이 없거니와 갈등을 부풀리지도 않는다. 술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존이 술로 망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간다. 티베트 어느 첩첩산중 토굴에서 막 나온 듯한 리더 도니(조나 힐)는 존에게 자아 성찰의 1단계, 희망을 심는 2단계 등 금주와 치유의 12 단계를 제시한다. 존에겐 날마다 상처들과 씨름할 일만 남았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아누(루니 마라)를 만나면서 존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캘러핸 카툰이 중간중간 쉼표 찍듯 유머를 선사하고, 하나님을 사탄 인형 ‘처키’로 부르는 이유와 악마숭배에 모성을 얹은 스릴러 <로즈메리의 아기> 인용은 흥미를 더한다. “남자가 필요 없는 여자들보다 무서운 게 있겠어요?” 라는 대사에 꼬집히는 여자들 정체를 밝히진 않겠다. <마스터>와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베니스와 칸영화제를 장악한 호아킨 피닉스는 풍부한 표정으로 클로즈업을 너끈히 소화한다. 특유의 과장된 액션으로 허풍을 날리는 잭 블랙과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아름답게 나오는 루니 마라, 차갑고 무심한 척해도 속 깊고 지혜로운 조나 힐 등 조연진의 연기도 무르익었다. ? ? 무위자연의 삶, 도니가 설파하는 노자 철학은 고지를 눈앞에 둔 존을 통해 <도덕경> 28장으로 넘어간다. 원문은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세상의 본보기가 되면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무극, 다시 말해 우주의 근원이 되는 조화로움의 지극한 경지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미워할 대상이 많았고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렸으며 자신을 돌아보길 애써 거부한 존. 용서라는 말처럼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게 또 있을까. 흔히들 관용과 화해를 용서와 한 덩어리로 묶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 했다. 용서할 만한 것만 용서한다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담담하되 노련한 연출은 ‘용서와 치유, 자유의 시퀀스’ 라 부름직한 대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옹을 두 남자가 나눈다. 치사량의 고독을 그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엔딩 크레딧을 감싸는 는 생전의 존 캘러핸이 곡을 쓰고 직접 부른 노래다. 침대에 온몸이 묶인 채 신세를 한탄하는 존에게 아누가 속삭인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겠나. <돈 워리>가 특별한 영화로 다가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7-31

  • 조회수 477

바보 성자의 간구와 수난 / 영화 <행복한 라짜로>

[칼럼] 바보 성자의 간구와 수난 / 영화 <행복한 라짜로>

열리는 장소나 성격에 관계없이 경쟁 영화제는 우열을 다투는 축제여서 뒷말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칸영화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잡다한 시빗거리를 잠재우기에 충분한 결과를 내놓았다. 전율마저 유쾌한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하다는 공감대를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얻어냈으며, 유난히 우수한 작품이 많았던 작년에 이탈리아 영화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 Happy as Lazzaro)>에 안겨준 각본상 또한 썩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수십 년 전 신문에 난 우중충한 기사 몇 줄로 보석처럼 빛나는 각본을 완성했으니까. 침체한 이탈리아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젊은 여성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솜씨다. 배우가 없어도 대사와 음악을 빼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시나리오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대이자 설계도인 시나리오를 잘 쓰는 공식이나 요령이라는 게 따로 있겠나.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면 될 일이다. 성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주인공은 영화에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유럽 젊은이는 이전 순수파처럼 표정은 해맑아도 눈길이 머무는 곳은 전혀 다르다. 행복을 꿈꾸는 걸까. 남들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걸까. ? 이탈리아 두메산골 인비올레타.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처럼 드리운 곳이지만 시대 배경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궁핍한 살림과 고단한 얼굴만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노숙자 합숙소 비슷한 방 몇 개에 54명이 득시글거리고, 밤이면 전등 하나를 차례로 옮겨가며 불을 밝힌다. 농부들은 알폰시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담배 농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지만 빚만 늘어가고 아이들은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부르는데, ‘호출’과 ‘호구’가 이음동의어로 느껴질 지경이다. 농사일을 거드는 건 기본이고 무거운 짐이며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번쩍번쩍 옮길 뿐 아니라 꼬마들과 놀아주거나 커피 배달까지 담당하는 청년 라짜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아무리 궂은 일을 떠맡겨도 눈살 한 번 찌푸린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지능이 낮거나 뇌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겸손하고 잘 생긴 이탈리안 마당쇠. 어느 날 후작 부인이 병약한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를 데리고 마을에 온다. 아들이 휴대 전화를 꺼낼 즈음에야 비로소 세상 풍경이 잡힌다. 농노를 부리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소작제가 폐지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후작 부인과 아들의 대화가 섬뜩하다. “저들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깨닫게 되지.” 부인의 말대로 귀족은 농부들을 착취하고 농부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특히 교육과 신앙을 미끼로 던진 후작 부인의 수업이야말로 고도의 세뇌 작전이다. 충직한 라짜로가 마음에 든 탄크레디는 살갑게 굴며 적절히 부려먹는다. 철부지 반항아인지 몽상가인지 종잡을 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꾸민 연극은 마을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온다. 로르와커 감독이 매직 리얼리즘의 붓으로 우화를 새길 화폭을 짜는 시점이다. 내레이션과 다양한 앵글, 역광과 몽환. 전반부를 느슨하게 매듭짓는 이 대목은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딱 한 줄로 정리하겠다. ‘선한 사람 냄새’와 초월적 존재. 휴식 시간에 잠깐 눈을 붙였다 장르가 다른 연주에 깨어나는 느낌일까.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새롭고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 직진한다. 그렇다면 그에겐 ‘등장’이 아니라 ‘강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후작 부인에게 빌붙었던 농장 관리인?니콜라는 늙었지만 착취 수법은 새롭다. 이주노동자들을 밥줄로 농락하는 대목에선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지기보다 “성격은 운명”이라는 옛 철학자의 말을 믿고 싶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를 자처하는 전자 기업이 나라 밖에서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현지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있으니까. 탄크레디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1963)에 나오는 귀족 이름이고, 라짜로는 신약성서의 나사로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는 나사로 둘이 나오는데 한 명은 예수의 눈물어린 기도로 무덤에서 살아났고, 다른 한 명은 거지로 죽어 하늘나라 부자로 영원히 산다. 두 나사로를 합친 듯한 라짜로는 어느 장면에선 예수의 현신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간구.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번영의 도시에서도 여전히 밑바닥을 헤매는 옛 동지들에게 라짜로는 또다시 모든 걸 내준다. 하지만 바보 성자에게 닥치는 배반은 잦고 감사는 짧고 수난은 길다. 소작농 패거리들이 한 끼 포식하려다 낭패를 보는 과정에서 터지는 웃음은 쓰디쓰다 못해 멀미가 날 지경이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다는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그윽한 눈빛은 물이 모래를 적시듯 넓고 깊게 파고든다. ? ? 성당 시퀀스는 127분 러닝타임에서 가장 빛난다. 다시 예수의 채찍질이 필요한 교회. 황홀하게 감겨 스산하게 내려앉는 선율. 얼마나 더 굴러 떨어져야 바닥이 보일까. 막막하고 난감하고 허탈한 시간 그리고 한줄기 눈물의 의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김현승의 시 <눈물>중에서). 하퍼 리 소설로도 유명한 영화 <앵무새 죽이기>(1962)에서 그레고리 펙의 아들에게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단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내세운 영화답게 환상과 환멸을 넘나드는 연출이 좋고, 필름 고유의 질감을 살린 촬영과 디테일 묘사도 돋보인다. 단역들의 조화롭고 자연스런 연기는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이자 자랑이다. 다만 늑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에선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우화에서는 교훈이 두드러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바보. 타인의 아픔을 못 견디는 사람. 끝 모를 사랑과 자비. 거룩한 희생. 그렇다면 당신 영혼의 눈은 열려 있는가. 겉모양으로 판단하고 낮은 소리엔 귀를 닫지 않는가. 선뜻 내주기보다 끝까지 뺏은 적은 없는가. 학대에 길들여지진 않았는가. 선한 이웃으로서 향기를 품고 있는가. 질문은 거세지만 <행복한 라짜로>는 교만하고 이기심에 찌든 마음을 거듭 행궈준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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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인간을 품은 영상 회고록 /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칼럼] 시대와 인간을 품은 영상 회고록 /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올해 제72회 칸영화제는 독특한 자세를 취한 어느 여성의 모습을 공식 포스터로 지정했다. 이전 칼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소개한 영화 촬영장 사진인데, 흑백이었던 원판에 색상을 입히고 배경을 바꿔 넣었다. 높다란 탁자 위에 무릎을 접은 중년 남자가 카메라 지지대를 붙들고 있고, 웬 젊은 여성이 남자의 등을 짐짝처럼 밟고 서서 뷰파인더에 눈을 붙인다. 원판을 눈여겨보면 일부러 꾸민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열정의 순간 포착 또는 몰입의 어떤 경지. 당돌하고 짓궂은 포즈대로 65년 예술 인생은 거침이 없었다. 창조와 실험, 여성과 사회, 독창성과 보편성.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명예 오스카상을 받고 안젤리나 졸리와 흥겹게 춤추던 때가 89살. 소탈하고 넉넉한 표정에 동글동글 빨간색 바가지 머리. “나는 스스로를 거장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동안 아주 정직하고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나는 그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수는 있겠지요.”라는 마지막 목소리. 이제 숙연한 마음으로 그의 생년과 몰년을 괄호로 여닫아 올린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 (1928 ~ 2019). ? ? Photo : La Pointe courte / 1994 Agn?s Varda and her children - Montage & design : Flore Maquin 아녜스 바르다에게 붙여진 ‘과소평가된 감독’이라는 의견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에겐 제대로 평가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가뭄에 콩 나듯 영화제서나 비칠 뿐 바르다 영화가 한국 극장에 처음 걸린 건 딱 1년 전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방랑자>는 물론 첫 장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비롯해 대표작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도 극장가엔 얼씬도 못했다. 2001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바르다 감독을 주목한 언론도 드물었다. 이번엔 모든 걸 쏟아 부은 마지막 작품이 들어왔는데도 복합상영관들은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또다시 외면했다. “예술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들만의 굳은 맹세인가. 전국을 통틀어 10개를 겨우 웃도는 스크린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바르다 감독에게 영화란 보여주는 것. 함께 보고 감정을 나눠야 하는 일. 텅텅 빈 영화관은 악몽이라며 고개를 젓던 바르다.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이가 악몽에 시달릴 일은 없겠지만,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이 만든다는 건 확실하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통해 극장이 ‘검은 도서관’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 제목에 걸맞게 영화는 마스터 클래스, 무대에 오른 감독의 강의로 시작한다. 바르다는 자기 연출 작업의 세 요소로 ‘영감’과 ‘창작’, ‘공유’를 꼽는다. 왜 만들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며 누구와 함께 나누는가. 영화(cinema)와 글쓰기(ecriture)를 결합해 창안한 ‘영화 쓰기(cinecriture)’ 는 바르다 영화의 원천인데, 작가의 개성이자 사상을 실어 나르는 바퀴인 문체에 비유할 수 있다. 바르다의 바퀴살은 콜라주와 퍼포먼스,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자유연상과 무의식의 심층. 착상부터 촬영과 편집을 거쳐 믹싱으로 마무리하기까지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무에게 송구스러울 정도로 조악한 회고록이 판치는 현실에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써내려간 영상 회고록을 보는 일은 즐겁다. 자신이 연출한 장, 단편 영화 20편을 선택한 바르다는 중요한 장면을 뽑아 간결하되 정확하고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다. 예를 들면, <방랑자>에 구사한 13번의 트래킹 숏(레일을 타고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 찍는 장면)을 얘기할 땐 카메라를 얹은 이동차에 직접 올라 부드러운 리듬의 효과를 알려주는 식이다. 그뿐 아니다. 떠돌이 노숙자 역을 맡았던 상드린 보네르를 현장으로 불러 17살 시절에 즐긴 ‘절대 자유’의 흔적을 찾아보며 감회에 젖기도 한다. ? 때론 인생이 영화를 만든다. <낭트의 자코>는 죽음을 앞둔 남편 자크 드미 감독에게 바치는 아내 바르다의 영화 찬가이자 절절하고 아름다운 순애보이다. 극대화한 클로즈업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화가는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감독은 퀴퀴한 시장 바닥에서 희망을 줍는다. 디지털 카메라가 지닌 현장감을 빼어나게 활용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생물학 석사를 포함한 걸인들은 버려진 걸 먹지만 정신만은 더 없이 풍요롭다. 할리우드로 건너 가 <블랙 팬서>를 찍을 땐 ‘침묵하는 다수’와 ‘분노하는 소수’ 사이에서 흔들리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작 <시몽 시네마의 101의 밤>엔 미국과 유럽의 별들이 다 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드 니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해리슨 포드,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 까뜨린느 드뇌브와 미셸 피콜리 등 세계영화사에 전무후무한 배역진인데,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 성적은 수수께끼로 남기겠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바닷가에서 꿈을 키운 80살 감독의 자화상이다. 거울과 종이 자동차와 빗자루, 폴 발레리의 시가 생각나는 장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무덤에 누가 잠들었는지는 스포일러 수준이니 밝히면 곤란하다. ? 사진가와 설치 미술가로서 발걸음도 씩씩하다. 연극 무대에서 출발한 바르다의 스틸 카메라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부터 살바도르 달리와 펠리니 감독을 거쳐 전족을 내민 중국 할머니까지 맹렬하게 셔터를 눌렀다. 쓸모없는 필름 가닥마다 햇살을 나눠줘 아늑하게 꾸민 ‘영화 오두막’을 분점처럼 하나씩 늘려가기도 했다. 바르다에게 예술이란 국가와 문화, 성별과 신분, 민족과 종교를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였다. 하트 모양의 튼실한 감자가 점점 쭈그러드는 사진과 영상을 실제 감자와 함께 배치한 <감자 유토피아>. 시들어가는 기쁨이라니.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던 바르다 감독은 필생의 엔딩을 몸 전체로 찍는다. 필멸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너지고 가라앉기보다 희미하게 사라지리라. 쓸쓸하고 덧없으나 가장 영화다운 작별. 그제야 비로소 115분 영상이 회고록을 넘어 유언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목적, 효용이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기 바란다. 감독을 지망하는 이들에겐 나침반으로 작동할 터이다. 시대와 인간을 품고 꿋꿋하게 외길을 걸어간 예술가. 위대한 정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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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빛과 그림자 / 영화 <논-픽션>

[칼럼] 디지털 시대의 빛과 그림자 / 영화 <논-픽션>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보내는 메일을 ‘email’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e’가 없어지고 그냥 ‘mail’이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ebook’도 그냥 ‘book’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을까.” 9년 전, 일본의 IT 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가 <전자책의 충격>에서 종이책의 운명을 가늠해 본 대목이다. 그가 예상한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전자기기가 독서의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인쇄술에서 네트워크로. 지적 공간의 새로운 생태계 구축. 길고 뛰어난 수명과 내구성, 저장성과 접근성. 구글은 십 수 년 전부터 도서관의 엄청난 책들을 코딩해왔고, 종이책을 팔던 아마존은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반듯하게 키워냈다. 음악의 디지털화에 성공한 애플도 태블릿 아이패드로 삼국지 전자전에서 컬러풀한 화력을 뽐낸 지 오래다. 버글스가 부른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미디어 변천사를 얘기할 적마다 수 없이 인용돼 온 노래다. 전자파에게 피습당한 종이책도 사망 신고를 내야할 처지에 이르렀나. 이제 종이책 읽기는 고상한 빈티지 취미로만 남을 것인가. 소멸이냐 공존이냐. 출판업계의 실상을 중심에 둔 프랑스 영화 <논-픽션(Non-Fiction)>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이들의 불안과 갈등, 고민을 숨 가쁘게 풀어놓는다. ? 연출을 맡은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아시아 문화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프랑스 감독이다. 홍콩 영화에 열광한 청소년에서 열혈 청년 평론가로 문필을 날린 아사야스는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완령옥>으로 홍콩 영화를 세계에 알린 장만옥을 파리로 불러들였다. 줏대 없는 프랑스 영화 산업을 야무지게 꼬집은 <이마 베프(1996)>를 촬영하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결혼했으나 3년 만에 갈라섰다. 5년 뒤 <클린>에 장만옥을 다시 주인공으로 세운 아사야스는 동료로 돌아간 옛 연인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훗날 장만옥은 “영화를 보는 관점을 키워준 이가 아사야스 감독”이라고 술회했다. 난데없이 케케묵은 스캔들을 꺼내는 건 <논-픽션>의 결말부가 주는 느낌 때문이다. 아사야스 영화라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를 먼저 손꼽을 듯싶다. 거기서 스크린 안팎 배우들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 연출에 감탄했다면 이전 작품도 찾아보기를 바란다. 예술의 가치와 영속성을 수채화처럼 새긴 <여름의 조각들>, 유럽 좌파를 사로잡은 제3세계 전사의 일대기 <카를로스>, 혁명과 예술을 함께 꿈꾼 시대를 되돌아본 <5월 이후> 등 소재는 다양하고 완성도는 높다. 이제 아사야스 감독의 재산 목록에 <논-픽션>을 추가해야겠다. ? 출판사 편집장 알랭(기욤 까네)은 전자책이 몰고 올 파장에 흔들린다. 오랜 친구인 소설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가 새 작품의 출간을 부탁하지만 창작자로서 그의 사고와 태도에 믿음이 가질 않는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범죄 수사극의 강인한 캐릭터로 인기를 모은 배우인데, 감수성은 풍부해도 차기작 선택엔 지나치게 신중하다. 국회의원 비서관 발레리(노라 함자위)는 남편 레오나르와 달리 활달하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여기에 종이책 시대를 끝내고픈 로르(크리스타 테렛)라는 디지털 마케터가 끼어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랑스 원제 <이중생활(doubles vies)>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종이책을 옹호하면서도 태블릿을 끼고 사는 나날, 가정에 충실한 이가 빠져드는 불륜, 자신의 경험을 허구로 포장해 활자로 옮기는 작가, 속아주면서도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 등 대다수가 위태롭게 경계를 넘나든다. 심리학자에겐 양가감정이나 딜레마로 비칠 수도 있겠다. 커피 한잔 즐기는 시간인 5분 만에 책이 나오는 ‘에스프레소 북 머신’. 도서관은 책의 창고로 머물 뿐 책의 내용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증거일 터이다. “글로 된 인류의 기억 전체를 인질로 삼아 사용자들을 광고주에게 판다.” 2천만 권 이상을 전자화한 글로벌 기업의 폭주에 토론자들은 한 목소리로 탄식한다. ? 상영시간 108분에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1687개. 그야말로 언어의 향연 아니 말 폭탄이다. 문화 예술 전반을 아우르며 터뜨리는 작품과 인물을 거론하기엔 지면이 좁다.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과 베리만 연출작 <겨울빛>에 최근작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보탠다.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에 원작을 제공한 시칠리아 작가 람페두사를 필두로 독일어권 문학의 이단아 토마스 베른하르트, 로맨스 소설의 대모 노라 로버츠, 철학자 아도르노, 화가 모네, 시인 말라르메 등 대충 추려도 어질어질하다. 신경증에 오지랖과 입심을 자랑하던 전성기의 우디 앨런이 울고 갈 지경이다. “서로 알지만 말려들고 싶진 않은 게 암묵이지.” “탈진실의 시대야, 각자의 선입관이 정해준 허구 세계에서 사는 거지.” 같은 아포리즘 수준의 대사를 쏟아내는가 하면, 신뢰나 소비 분석 알고리즘으로 정치인과 비평가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장소를 바꿔가며 토론과 논쟁을 이어가는데, 실없거나 허투루 사용한 대사는 찾기 어렵다. 따분하게 들리지 않거니와 현학 취미와도 거리가 멀다. 유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건 상황과 비유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소신과 무실서와 혼돈을 이야기할 땐 5세기 유럽을 거의 삼켰던 훈족왕 아틸라를 비롯해 정복자 칭기즈 칸,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인용하는 식이다. 대사의 리듬과 강약을 조절하는 카메라와 편집이 돋보인다. ? 과학기술의 총화로 일백년 가까이 군림한 필름이 몸 둘 바를 모르는 영화 시장.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놀던 영사실의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멈췄다. 사라졌고 사라지는 것들. 미련과 반추, 향수. 아사야스 감독이 굳이 16mm 필름으로 촬영해 35mm로 확대한 이유일 것이다. 입자가 거친 영상이지만 몽당연필로 종이책에 밑줄을 긋는 것처럼 정겹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당당하다고 주장해도 불륜을 독려하거나 권장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여기 불륜 행위는 너저분한 패륜이라기보다 느긋한 바람기 정도로 비친다. 악다구니 치거나 징징대지 않으며 무책임한 욕정을 자극할 생각이 없다. 특히 야릇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에선 관록과 경륜이 느껴진다. “쿨하다”는 표현은 낡았어도 아직은 쓸 만하다. 근엄한 도덕론자라면 질색하거나 당혹스러울 수 있겠다. 삶이라는 현실에 담긴 수많은 허구, 불안과 확신의 공존, 진실과 거짓의 충돌, 침묵과 은폐, 모순과 아이러니의 인생사. 실제 이름을 통해 짧지만 크게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주제와 맞닿아 있다. 픽션과 논픽션, 팩션이 뒤엉켜 도돌이표를 찍는 기분이다. 디지털 변혁의 시대를 맞아 관계와 상황과 흐름을 격조 있게 탐구한 <논-픽션>이 남긴 메시지는 두 대사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안 변하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 “관습과 기준을 넘어선 인간의 재발견이 디지털의 과제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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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과 고난도 섭리이거늘 / 영화 <퍼스트 리폼드>

[칼럼] 역경과 고난도 섭리이거늘 / 영화 <퍼스트 리폼드>

어둔 밤, 한 남자가 노트에 무언가를 골똘히 기록한다. 책상 끄트머리엔 그의 취기를 짐작케 하는 술병이 놓여 있다. 그리고 큼직하게 가로질러 휘갈긴 ‘I have found a new form of prayer’라는 마음의 소리. 폴 슈레이더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포스터와 광고 문안이다. 제목은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교회를 가리키는데 250년 전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뉴욕 북부에 세웠다. 어둡고 혼란스런 중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영문 표기가 일러주듯 기독교(개신교)의 출발은 개혁이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면죄부를 판매할 정도로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무너뜨렸고 유럽 전체의 역사와 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제는 종교가 개혁과 변화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크기만 키우려 힘을 쏟을 뿐 시대의 아픔과 낮은 자리는 외면한다. 아름답게 창조된 천지만물에 감탄하면서도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뒤척이며 잠을 설치는 이 성직자는 어떤 새로운 형태로 간구하며 견뎌낼 것인가. ? ? 41년 동안 시나리오 18편 집필에 연출 작품은 21편. 다양한 소재를 폭 넓게 다뤘거니와 열띤 논쟁을 끌어냈어도 졸작이 드물다는 점에서 폴 슈레이더의 영화 재능은 높이 평가받아야겠다.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 각본가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어플릭션>과 <미시마>에서 보여준 연출력도 대단했다. 빛보다 어둠을 탐색하며 희생과 구원의 의미를 물었던 슈레이더의 눈길은 여전히 차갑고 무겁다.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일찍이 흑인 노예들을 보호해 탈출시킬 만큼 앞서 나간 교회였지만, 지금은 교인 몇 명만 자리를 채울 뿐 ‘기념품 가게’ ‘관광 교회’로 전락한 처지다. 담임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한 땐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지금은 혼자다. 가족사에 얽힌 죄책감과 절망감에 술을 끊지 못하고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진다. 어느 날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라는 신도로부터 남편 마이클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환경운동가 마이클에겐 전쟁보다 무서운 게 환경오염과 자연훼손이다. 아내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것도 오염된 세상에선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면밀히 분석한 환경 영향 보고서는 외골수 운동가를 더욱 과격하게 만든다. 니체가 그랬던가,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라고. ? “인류의 위대한 업적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삶이 위기에 처했다.” “인류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밤이 깊을 때 어둠에 맞서 일어나곤 했다.” “자연을 지키려던 운동가들이 작년에만 117명이 죽었다.” 대화는 팽팽하게 이어지는데, 반박할 논거가 빈약한 톨러는 수세에 몰린다.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모두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나왔으니 지구는 모든 생명체의 집이 아니겠는가. ‘풍요로운 삶 교회’ 목사 제퍼스(세드릭 더 엔터테이너)는 이상만 쫓는 성직자 아니 실속 없는 관광 가이드 톨러에게 핀잔만 준다. 더 풍요롭기를 갈망하는 제퍼스 모습에서 세속주의와 상업화, 대형화로 치닫는 오늘날 교회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통계와 자료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신앙에 의존할 것인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모든 보존 행위는 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톨러. 밤마다 쓰는 내면일기는 고뇌와 탄식으로 채워진다. 갑자기 맞닥뜨린 섬뜩한 사건과 곤혹스런 해결책은 그의 실천적 행동에 불씨를 지핀다. 성직자가 주인공이어서 요셉과 야곱, 욥 같은 구약 시대 인물에 몇몇 성서 구절이 들리지만 부담을 안기거나 근거도 없이 난해한 척 하지 않는다. ? ? 슈레이더는 20대 중반에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감독 연구서를 펴냈다. 그래서일까. 몇 대목은 로버트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와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잉그마르 베리만의 <겨울 빛> 같은 걸작 고전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끌어다 쓴 게 아니고 참고로 삼은 수준이니 쓸데없는 트집을 잡으면 곤란하다. 숏 12개를 몽롱하게 이어간 '마법의 여행'은 포르투갈 영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과 포즈는 비슷해도 용도는 전혀 다르다. 톨러에게는 신비롭되 고통스런 체험이었으니까. 카메라는 배경이나 구도보다 주인공의 심경 변화에 초점을 맞춰 나간다. 고통의 사제가 자신만의 ‘First Reform’을 완성하는 과정일 터이다. 근사하게 나이 든 에단 호크는 향기 나도록 무르익은 연기를 보여주는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랐으니 말문이 막힌다. 톨러가 영적 스승으로 흠모하는 토마스 머튼(1915~1968)은 자서전 <칠층산>에서 자신의 삶을 ‘지속된 회개의 연속’이었다고 토로했다. “나는 두렵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까봐.”라는 고백. 방황하는 톨러에겐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로 들렸을 듯싶다. ?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에 있는가. 베리만 감독이 평생토록 씨름한 화두는 ‘신의 침묵’이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도 <사일런스>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화답 없는 신을 향해 기도만 해야 하는가. <퍼스트 리폼드>도 믿음과 의심의 문제를 건드린다. 유한한 삶, 내던져진 인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니아 연대기> 원작자이자 <쉐도우 랜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C. S. 루이스의 말은 귀 기우릴 만하다. “신이 드러내 놓고 직접 세상에 간섭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뜻을 알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세상이 끝나는 날이다.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이다.”?후반부에 들어 슈레이더 감독은 스릴러를?표방한 이유를 확인시킨다. “종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인가. 어쩌면 '지하디즘'의 야릇한 변형. 성가 <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는?19세기 말에 작곡한 곡이기에 <더 브레이브>와 <와일드 빌> 같은 서부극에 자주 쓰였다. 여기서는 재즈풍으로 편곡해 여성 솔리스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흐르는데, 교차 편집의 효과가 크다. 돌진과 회전 그리고 침묵. 느닷없는 적막감에 조금은 당혹스럽지만 결말부에선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원리. “역경과 고난도 섭리”라는 겸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역설. 수난과 희생, 부활을 알리는 4월에 어울리는 영화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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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고효율의 스릴러 / 영화 <더 길티>

[칼럼] 저예산 고효율의 스릴러 / 영화 <더 길티>

바이럴 영상 한 편이 화제다.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확산된다고 해서 붙여진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은 어원대로 입소문 촉진 전략을 말한다. 특출한 광고 영상을 본 누리꾼들이 퍼 담거나 공유하는 식으로 전달해 상품을 알리고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방식이다. 화제가 된 바이럴 영상은, 맛보기 수준으로 영화 장면을 소개하거나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능청스런 대화를 곁들여 영화제 수상 경력과 나라 안팎 전문 매체들의 평가를 요란하게 띄운다. 제목마저 감춘 채 궁금증을 높이더니 개봉일이 미정이라는 사실만 강조한다. 영등위 등급 분류엔 아예 <개봉 미정>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제명으로 신청해 12세이상관람가를 받았다. 흥행 작전치고는 생뚱맞고 치기가 넘치지만 나무랄 수는 없겠다. 돈냄새 물씬한 작품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마을버스 배차하듯 스크린을 몰아주는 판이니 궁핍하고 맷집 약한 영화인들에겐 언감생심, 눈치만 보다 나가떨어지기 일쑤이다. 관객 천만 명 달성도 놀랍지 않은 현실에서 ‘풍년거지’ 신세의 영화들은 쪽박마저 깨질까 두렵다. 언제쯤 극장에 걸릴지 모르겠으나 정체를 밝히는 게 좋겠다. <더 길티(Den skyldige, The Guilty)>라는 덴마크 영화다. 관람을 마칠 즈음에 원제는 ‘유죄’보다 ‘죄책감’으로 읽힌다. ? ? 첫 장편 <더 길티>를 발표한 구스타브 몰러 감독의 이력은 단출하다. 31세, 스웨덴 태생, 덴마크 영화학교 졸업, 단편 <어둠 속에서(In Darkness)>로 ‘Next Nordic Generation’ 상 수상. 감독 데뷔에 영향을 끼친 영화는 시드니 루멧 연출에 알 파치노 주연의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1975). 주인공이 한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대화나 모니터 화면으로 작품 전체를 꾸미는 방식은 새롭지는 않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로크>에서 운전대를 잡은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연은 통화와 독백만으로 풀려나간다.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의 <베리드>는 90분 동안 관 뚜껑을 열어젖힐 생각이 없다. 전체에서 5분을 뺀 모든 시간을 생매장당한 남자의 목소리로 채운다. <서치>에서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노트북과 유튜브, 페이스북 등 디지털 영상만으로 사건을 매듭짓는다. <더 길티>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상영시간 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앞질러 얘기하면 세 작품에 견줘 규모는 작고 서사는 간결하지만 몰입감과 반전은 조금 더 높고 강하다. 할리우드에서 제이크 질렌할을 내세워 리메이크에 들어간다는데 스포일러를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 어둔 밤 112 긴급 구조 센터에서 근무 중인 아스게르 홀름(야곱 세데르그렌)은 약물에 취한 주정뱅이의 헛소리를 들어주거나 홍등가에서 지갑을 털린 남자가 내지르는 푸념이나 받아줘야 하는 처지다. 그가 발이 묶여 장난질 전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은 중반부턴 대충 알아차릴 수 있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어느 여자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보채는 아기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 여자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차로 이동하는 상태라며 겁에 질린 목소리를 이어간다. 아스게르는 여자에게 “예, 아니오”로만 답변할 수 있게끔 유도해 납치범을 안심시키고 자동차 추적에 나선다. 전화가 자주 끊기자 다급해진 아스게르는 규정을 어겨가며 혼자 사건을 해결하려는데, 동료 대원들은 오지랖 넓은 그에게 눈총을 보낸다. 여섯 살짜리 딸과 갓난아기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부부. 두 아이만 남은 집에 경찰관 친구를 보내고 본부에 차량 수배를 요청한 아스게르는 납치범의 신상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이들을 찾아간 친구가 알려온 소식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 현장이 아닌 구조 센터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수단은 전화뿐이다. 아스게르의 동료들은 몇 마디만 건넬 뿐 구경꾼이자 드라마의 병풍에 머문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아스게르 곁을 벗어나질 않는다. 1인 밀실 실험극이자 공간의 미니멀리즘. 잘 들을수록 잘 보이는 원리. 집중력에 따라 호, 불호가 갈릴 터이니 헤드셋을 착용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게 좋다. 클로즈업의 적절한 쓰임새를 비롯해 푸르고 붉은 조명을 번갈아 사용해 ‘내 코가 석 자’ 지만 본분에 충실하려는 사내의 피로와 불안, 고독을 담아내는 수법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정밀한 사운드 설계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본령을 확인하게 한다. 비 오는 소리와 차창을 닦는 와이퍼 움직임, 초인종 소리와 경찰차의 경적, 문 여닫는 소리 등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상하는 일은 오싹하면서도 즐겁다. 한정된 장소에서 전화로 실시간 중계하는 사건사고. 청각으로 화폭을 짜고 소리로 붓질하는 경험은 흔치 않을 터이다. 잔혹한 폭력과 무책임한 성욕으로 한몫 보려는 영화들의 흥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스웨덴 중견 배우 야곱 세데르그렌의 표정 연기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 반전이 기발한 스릴러를 이야기할 적마다 빠지지 않는 영화가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 센스>이다. 특히 두 작품의 스포일러는 그야말로 천기누설 수준이었다. 각각 수수께끼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한 케빈 스페이시와 브루스 윌리스의 정체를 까발리면 ‘쳐 죽일 놈’ 취급을 받아야 했으니까. <더 길티>의 주요 정보 또한 그에 버금갈 정도이니 입이 근질근질해도 앙다물어야할 일이다. 인간적 이해와 긍정적 존중, 수용을 바탕에 둔 ‘감정이입’ 문제를 다룬 범죄 스릴러지만 한편으론 ‘구원과 속죄’의 주제로도 비친다. 결말부는 오스카 와일드의 따뜻한 독설을 떠올리게 한다.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성인은 누구나 과거가 있고 죄인은 누구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날개를 단 상상력. 예측하기 어려운 이야기와 강렬한 서스펜스, 경이로운 반전. 저비용에 고효율. 촬영 기간은 13일이면 충분했다는 점도 기록해야겠다. 자본과 스타가 영화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더 길티>를 본 영화인이라면 제작 여건 따위의 핑계를 늘어놓긴 어려울 터이다. 민망하고 구차한 변명, 그래서 유죄. 추리극과 스릴러 장르에 관심이 있거나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는 이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영화다.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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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세상과 시린 마음에 꽃등불 /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

[칼럼] 흐린 세상과 시린 마음에 꽃등불 / 영화 <메리 포핀스 리...

마법사 보모가 돌아왔다. 자그마치 54년 만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까만 우산을 잡고 내려와 후크 선장과 볼드모트 같은 악당을 때려눕힌 여성들을 기억하는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는 아예 대놓고 시그니처 포즈를 흉내 낸다. 푸른빛 궁사 욘두 우돈타가 우아하게 하강하며 엉뚱하게 웃긴 그 패러디의 주인공이 바로 메리 포핀스다. 영국의 아동문학가 패멀라 린던 트래버스(1899~1996)가 펴낸 연작 소설 <메리 포핀스>는 1964년 스크린에 옮겨져 뮤지컬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타이틀 롤을 맡은 줄리 앤드류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메리’라는 이름은 지금도 보모를 지칭하는 품사로 여길 정도이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말썽만 부리던 남매가 빠져드는 환상과 모험의 세계. 사람들이 굴뚝 연기를 타고 지붕을 날아다니거나 그림 속을 드나들며 춤을 추는 경이로운 장면들. 이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 많았던 사연은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20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트 디즈니(톰 행크스)가 영화화 판권을 얻으려 23년 동안 트래버스(엠마 톰슨)를 설득했다는 사실이며 어릴 적 상흔과 치유는 관객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 ? <메리 포핀스 리턴즈(Mary Poppins Returns)>를 연출한 롭 마셜은 브로드웨이 안무가 출신답게 뮤지컬 영화를 즐겨 찍었다. 할리우드 진출작 <시카고>는 춤과 음악이 신명나게 동업할 뿐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교차 편집을 이용해 같은 시퀀스를 두 가지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신선할뿐더러 쇼 비즈니스 세계와 언론에 대한 야유, 갱스터풍 총격과 관능미는 보는 이들의 넋을 빼놓을 만했다. 트로피 수집가로 불러도 좋을 만큼 상복도 터졌는데, 두 번째 뮤지컬 영화 <나인>에선 지나친 자신감이 오히려 독이자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소문난 바람둥이 사내와 그를 에워싼 여성 7명의 현란한 쇼는 정신 사나운 퍼포먼스에 그친다. 말이 좋아 ‘버라이어티 뮤지컬 영화’이지 ‘영화’는 지치도록 ‘뮤지컬’ 뒤치다꺼리만 한다. 디즈니가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가져온 <숲 속으로>는 어설프게 재해석한 퓨전 동화였다. 숲보다 나무에 신경을 쓴 탓인지 감독은 자주 머뭇거린다. 투박하게 정리하면, 롭 마셜의 뮤지컬 영화 대전 성적표는 1승 1패 1무이다. 4번째로 도전한 마셜 감독에 거는 기대는 크지만 설렘과 불안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 ? 뮤지컬 영화의 속편은 기획 자체가 쉽지 않다. 노래와 춤이 뛰어나도 스토리가 빈약하면 약효 떨어진 재탕이 될 가능성이 크다. 원작의 명성이 높을수록 속편에 대한 부담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눈치도 빠르게 뱅크스 집안의 족보부터 손에 넣은 롭 머셜은 말썽꾸러기 남매를 20년 뒤로 보낸다. “가로등을 끄더라도 슬퍼하지 말아요. 햇살이 런던을 훤히 비춰줄 테니.” 첫 장면에 흐르는 는 경제 대공황의 수렁에 빠진 시대라는 걸 넌지시 일러준다. 누나 제인(에밀리 모티머)은 미혼이지만 동생 마이클(벤 위쇼)은 아내와 사별하고 3남매를 키운다. 지지리 궁상 화가에서 파트타임 은행 직원으로 전업했으나 며칠 지나면 가족과 함께 거리에 나앉아야 할 형편이다. 착하되 세상 물정 모르는 홀아비가 탐욕스런 은행장 윌리엄(콜린 퍼스)의 흉계에 걸려든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증권만 찾으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어 구석구석을 뒤지지만 마이클의 눈엔 잡동사니만 잡힌다. 칙칙한 날씨와 치솟는 종이연, 회오리바람이 판타지의 출발을 알린다. 그때 그 자세로 귀환한 메리 포핀스(에밀리 블런트)는 불우이웃 전담관 노릇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 불가능한 것들까지도.” 원작에서 포핀스의 조력자로 활약한 굴뚝 청소부는 가로등에 불을 붙이는 잭(린 마누엘 미란다)으로 바뀐다. 마법사와 점등원이라는 주요 인물에 이따금 추임새를 넣는 퇴역 해군 제독이 가세하면 디즈니 영화 특유의 포근한 밑그림이 그려진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원형을 보존하되 영리하게 재활용하는 솜씨가 만만찮다. 세 녀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선율, 욕조 거품을 타고 미끄러지면 곧바로 깊고 푸른 세상. 디즈니가 30년 전에 건져 올린 <인어공주>를 생각나게 한다. 예전처럼 의인화를 시도하진 않지만 황홀한 유영과 해저 풍경만으로도 흐뭇하고 신난다. 꽃잎 날리는 동산에서 시작한 실사와 2D 애니메이션의 콜라보는 로얄뮤직홀 무대에서 정점을 찍는다. 합성 장면을 놓고 어색하다거나 유치하다고 투덜댄다면 꿈을 잃었다는 증거이다. 동심에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근엄하게 개연성과 리얼리티를 따지며 시비를 거는 건 어리석다. 원작 판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할 때 트래버스는 단 한 장면에도 애니메이션을 용납하지 않았다. 얄궂고 경박한 손장난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저질과 불량이라는 딱지를 떼기까지 만화는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다. 우리에겐 아직도 “만화 같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니까. 만화가 지닌 무한대의 상상력과 표현력. 영화의 숏이 만화의 칸을 따라잡기 불가능한 이유다. 롭 마셜의 내공을 보여주는 대목은 밤거리에서 펼치는 군무인데, 노래 제목대로 반짝반짝 판타스틱 행진이다. 자전거와 사다리, 횃불을 이용한 춤판은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인다. 곡예사와 체조선수 뺨치는 묘기와 역동성이 한껏 흥을 돋운다. 그리고 “인생의 안개를 뚫자”는 맹렬한 함성. ? 원조 포핀스는 물론 에밀리 블런트와 벤 위쇼를 비롯해 연기자 대다수가 영국 출신이다. 런던 중심가에는 지금도 가스 회사 직원들이 오렌지 빛 가로등을 밝힌다. 카메라는 곳곳을 돌며 영국 문화와 전통을 확인시킨다. 빨간 이층 버스는 기본이고 런던의 명물 빅 벤과 버킹엄 궁전, 세인트폴 대성당을 거쳐 로얄덜튼 도자기 자랑도 한다. 장면마다 오색 물감을 흩뿌린 듯 화려한 색채는 뮤지컬 장면들을 더욱 풍성하게 꾸민다. 과욕을 부리거나 무리수를 두지 않는 연출이 좋다. 디즈니표 돋보기와 영국산 망원경을 여유롭게 사용한 덕분이다. 에밀리 블런트에게 포핀스 역은 반갑지만 내키지 않은 모험이었을 듯싶다. “잘해보았자 본전”이라는 압박감. 언니보다 나은 동생은 아니지만 능란하게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원작의 굴뚝 청소부 딕 반 다이크가 93세에도 씩씩하게 춤추는 장면을 보니 줄리 앤드류스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단조롭고 성긴 이야기 짜임새와 악당이 싱겁게 퇴장하는 대목이 흠으로 비치지만, 티가 조금 있다고 해서 옥을 외면할 순 없겠다. “사람들이 끝이라고 할 때 시작이란 걸 보여줘.” “인생은 풍선, 희망과 즐거움으로 채워요.” “올라갈 일만 남았어.” 지혜로운 마지막 노래들이 후렴구로 맴돈다. 살벌한 경쟁심부터 배우며 건물주를 꿈꾸는 아이들. 고단하고 때론 철딱서니 없는 어른들. <메리 포핀스 리턴즈>는 흐린 세상과 시린 마음에 등불을 켠다. ?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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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적을 베푸소서 / 영화 <가버나움>

[칼럼] 사랑과 기적을 베푸소서 / 영화 <가버나움>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Capernaum)>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놓고 일본 영화 <어느 가족>과 마지막까지 다퉜다. 몇몇 언론은 종려나무 잎사귀를 꽂아주듯 아랍권 식구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는데 결과는 심사위원상에 만족해야 했다. 시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이들 두 가족은 내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분 최종심에서 다시 맞붙을 것으로 점쳐진다.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던 마을로, 신약성서의 사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사람 낚는 어부들’을 거느린 예수가 사역한 본거지이자 숱한 기적을 낳은 무대였으나 7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배덕에서 멸망으로, 라는 예언대로였다. 20세기에 들어 그 옛날 회당 터와 주춧돌 등 유적이 하나씩 드러났고 이제는 성지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폐허만 남은 지역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메인타이틀 아래에 뜬 ‘CHAOS’의 상황은 중반이면 알아차리게 되지만, 제목이 품은 의미를 파악하려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 ? 백향목 숲이 울창한 나라이며 산문시 <예언자>로 널리 알려진 칼릴 지브란의 조국 레바논. 하지만 <가버나움> 거리에는 악취가 풍기고 사람들은 지혜의 말씀엔 귀를 닫는다. 레바논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살펴보고 감상해야 할 영화다. 이슬람 국가로 통칭되는 중동 지역 여러 나라와 달리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거의 동등하게 세력을 유지해 왔지만, 종파에 따라 생성된 수십 개 정파에겐 분쟁이 바로 생존이었다. ‘종교 박물관’ 나라다운 복잡한 구성과 갈등은 25년에 걸친 내전에 15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으며 지금은 4명 가운데 1명이 난민이다. 아랍권에선 드물게 비키니 수영복과 음주를 허용하는 나라지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채가 많다. 경제를 살리려 의료용 대마초 합법화를 시도하는 판국인데,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20만 명이 넘는다. 레바논에서는 부모가 승낙하면 9살부터 결혼할 수 있고, 승낙하지 않아도 14살이면 혼인이 가능하다. 세계 영화계를 통틀어도 연기를 겸하는 여성 감독은 흔치 않다. 프랑스의 멜라니 로랑을 제외하면 데뷔작 <카라멜>(2007)부터 <가버나움>까지 각본과 연출과 연기를 도맡은, 레바논 출신 나딘 라바키 감독이 첫 손에 꼽힌다. ? ‘중동의 파리’ 베이루트로 간 카메라는 도심을 벗어나 빈민가에 자리를 잡는다. 수갑이 채워져 법정으로 들어오는 12살 소년 자인 (자인 알 라피아). 칼로 사람을 찔러 5년형을 받고 수감된 처지에 제 부모를 고발했다. 어린 녀석이 소송을 제기한 까닭은 당혹스럽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다. “저를 낳았으니까요.” 자인을 증언대에 앉힌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길고 짧게 5번을 오간다. 아들 나이도 모르는 주제에 부모랍시고 둘러대는 변명은 한심하지만 멱살을 잡을 수 없게 만든다. 불법체류자 신세여서 신분증은 고사하고 출생증명서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을 몇이나 낳은 건지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짐작하기도 어렵다. 일찌감치 감옥에 터를 잡은 큰아들은 쥐어짜는 마약 개발에 여념이 없고, 단칸방에는 보행기에 발목이 묶인 아기를 포함해 여섯 아이가 올망졸망 아니 바글바글 거린다. 어른들이 가르친 거짓말에 능숙해진 아이는 제 몸보다 무거운 가스통을 배달하는 등 앵벌이도 울고 갈 삶을 이악스럽게 버텨낸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전거 도둑>과 <구두닦이>의 소년들이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가족에 견줘도 훨씬 고단하다. 게다가 몇 푼이 아쉬운 부모는 11살짜리 딸을 아저씨뻘 사내에게 팔아넘긴다. 전통과 풍습을 빙자한 매매혼을 감독은 매섭게 비판한다. 파괴와 파탄, 살의를 부르는 만행. ? 떠돌이에게 어울리는 곳은 서커스단.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를 닮은 풍경이 재미있다. 집을 나온 자인은 에티오피아 출신 미혼모를 만나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한다. 가출 소년과 불법체류 여성이라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설정이지만 젖먹이 아기 덕분에 화면은 활기를 띤다. 궁핍해도 상부상조가 즐거운 어느 날, 아기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고 자인의 임무는 보모에서 유모로 바뀐다. 채플린의 따뜻한 팬터마임 <키드> 전반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유모의 나이 때문인지 이쪽 형편이 더 난감하다. 소년에겐 팔자에 없을 육아체험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며 긴장감과 웃음을 준다. “아이와 개는 최고의 연기자”라는 말이 실감나는데, 거리에서 캐스팅한 자인 알 라피아는 연기 유전자를 타고 난 것 같다. 궁하면 통하는 법.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수법들은 아주 기발해 옮기기가 꺼려지지만 한 가지는 밝혀도 좋겠다. 이런 식의 안타깝고 막막한 상황이 이어지면 ‘애늙은이’를 내세우거나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며 닳아빠진 판타지를 우겨넣는 영화가 적잖다. 하지만 나딘 라바키 감독은 몸을 낮추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깨진 거울을 활용해 소년과 아기를 기쁘게 만들고 흐뭇하게 재우는 대목은 탄성이 절로 난다. 소년이 눈물로 끓이는 분유는 어떤 맛일까. 불법 입양과 아동 매매가 판치는 상황이어서 지켜보는 마음은 점점 타들어간다. ? 악전고투 육아일기를 써가던 영화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난민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자칫하면 겉돌거나 삐걱거릴 수 있었으나 이야기는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어쭙잖은 연민보다는 공감과 성찰로 이끄는 연출이 좋다. 때로는 냉정해도 담담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믿음이 간다. 자극적인 영상이나 과장된 문구로 측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이른바 ‘빈곤 포르노’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낳기만 할 뿐 기를 줄을 모르는 어른들. 무능하면 비정하지나 말지. 자인의 호소는 절규에 가깝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어요.”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방치와 학대, 착취가 횡행하는 세상에선 교육은커녕 건강하게 사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아이 마을 전체가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대로 절실한 마음과 사회 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구호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꿈을 키우며 살아야 할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가. 날개를 단 듯 까마득히 올라간 카메라에 빈민촌이 게딱지처럼 잡힌다.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신의 눈으로 지켜본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소외된 이들에게는 더욱 시리고 쓸쓸한 계절이다. 송구영신의 길목에서 <가버나움>은 한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소망한다. “사랑과 은혜와 기적을 베푸소서. 평안한 그때처럼.” ?? 글. 영화평론가_ 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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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전설의 즐거운 고별사 / 영화 <미스터 스마일>

[칼럼] 할리우드 전설의 즐거운 고별사 / 영화 <미스터 스마일>

“캘리포니아 말리부 해변에서 돌을 던지면 뒤돌아보는 사람들 십중팔구는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금발 청년이다. 하지만 레드포드만큼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상을 지닌 사람은 없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골드먼의 말이다. 어느 영화학자의 그 인물 품평은 더 상세하고 유머러스하다. “알몸으로 있어도 자연스럽고, 잘 생긴 게 분명하나 외모에 치중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온건하고 신중하다.” 성품은 물론 맵시와 솜씨도 좋은 이 할리우드 스타의 연기 폭과 깊이를 몇 줄로 요약하긴 어렵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스팅>,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과 <내일을 향해 쏴라>, <추억>과 <내츄럴>, <위대한 개츠비>와 <올 이즈 로스트> 등 제목만 훑어봐도 감동과 재미에 빠져든 기억이 새롭다. 감독으로서 위상도 우뚝했다. 첫 번째 연출한 <보통 사람들>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가볍게 따내더니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는 싱싱한 브래드 피트를 낚았고 <퀴즈 쇼>와 <호스 위스퍼러>, <음모자>로 빼어난 연출을 보여주었다 스크린 밖의 삶 또한 박수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200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혁신적인 방법으로 지구 환경 보호에 앞장선 레드포드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레드포드의 말을 빌리면, 환경 보존이란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 로버트 레드포드가 창설한 선댄스 영화제는 수많은 영화 재능을 발굴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스티븐 소더버그와 <블러드 심플>의 코언 형제, <저수지의 개들>의 쿠엔틴 타란티노와 <위플래쉬>의 데이미언 셔젤 등 이젠 세계 영화시장을 흔드는 연출가들이다. 레드포드와 관련된 영화 정보를 뒤적이는 까닭은 지난여름 82세를 맞은 그가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배우 생활만 끝낼 뿐 연출과 제작까지 중단하는 건 아니라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미스터 스마일(The Old Man and the Gun)>은 60년에 걸친 연기 인생을 접는 레드포드의 고별사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뚱딴지같은 우리말 제목에 한숨이 나오지만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주인공이 이따금 미소를 날리는 건 확실하니까. <잃어버린 도시 Z> 원작자 데이비드 그란이 주간 잡지 뉴요커에 올린 단편 소설을 <고스트 스토리>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가 다듬어 연출했다. 원제에서 총을 든 노인은 미국 플로리다 출신 포레스트 실버 터커 (1920 ~2004)로, 세계은행강도 인명사전 첫 장에 올려 마땅하다. 범행 횟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거니와 탈옥 전과도 가히 국가대표급이다. 30번 시도에 18번 성공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 능청스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메인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주인공의 경력과 개성을 또렷이 보여준다. 패셔너블한 옷차림을 비롯해 보청기로 위장하는 센스와 간단한 지문 방지 비법,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챙기는 여유도 있다. 게다가 목청을 높여 위협하거나 권총을 꺼낼 생각도 없다. 은행 직원이나 손님들의 표정이 범행 과정을 짐작케 할 뿐이다. 동료 두 사람은 망을 보거나 차를 모는 선에서 작업을 거든다. 강도단 리더 터커(로버트 레드포드)는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옆 동네 마실가듯 과업을 수행한다. “생계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 진단하는 대목에선 정신까지 털리는 기분이다. 피해자들이 반응하는 태도는 더욱 놀랍다. “아주 정중했어요” “정말 점잖은 분” “행복해 보였어요” 등 거의 팬클럽 수준이다. 이들 3인조를 퇴물로 취급하며 추적에 나선 형사는 존 헌트(케이시 애플렉). 남자 배우는 콧수염 하나로 얼굴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74세 낭만파 강도의 나른한 삶에 쥬얼(씨씨 스페이식)이라는 여성이 들어선다. 석양에 물든 강물을 가르는 뗏목처럼 로맨스를 엮어가는 연인들. 할리우드의 베테랑답게 두 배우가 척척 맞춰가는 연기 호흡은 흠 잡을 데 없어 보인다. ? 상영 시간 내내 레드포드의 작품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남자 배우 둘이 짝을 이뤄 티격태격하는, 이른바 ‘버디 무비’의 원형으로 꼽히는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이다.?설정과 상황을 복기하면서 연결 고리를 찾으려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벽에 난 구멍’과 ‘퇴물 강도’ 라는 갱단 이름, 은행 창구 직원을 대하는 익살스런 행동, 목장 길을 달리는 자전거 곡예와 말 타기. 의 경쾌한 대비. 레드포드의 젊었을 적 모습을 그대로 사용한 머그샷(mugshot). 82세 원로에서 33세 샛별이자 선댄스 키드로 가는 여정이 꿈길 같다. 연기 인생을 이토록 의미 있고 멋지게 마무리하는 배우가 또 있을까. 인생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벽 글씨, 귀금속 가게에서 발동한 악동의 장난기, 마술사도 혀를 내두를 탈옥 묘기 등 사려 깊게 쉼표를 찍는 삽화들이 즐겁다. 겉멋을 부린 몇 장면은 허구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지만 완성도를 해칠 정도는 아니다. 실시간 중계하듯 현장을 재연하는 수법은 긴장감을 높인다. 범행 직전엔 언제나 날짜와 장소, 분 단위의 시간까지 표기해 리얼리티를 강조하기도 한다. ? ?필름 보관소에서 제공한 푸티지 (특정 사건을 담은 장면) 활용이 돋보인다. 길을 잃었으나 길 위에 머물 수 없는 여정.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깃털처럼 날아가 버릴 삶. ‘아메리칸 뉴 시네마’ 의 걸작 <자유의 이차선>(1971) 한 대목은 터커와 쥬얼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배경 음악으로 사용한 올드팝 중 후반부 자동차 추격전에 흐르는 의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노랫말이 화면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1960년대 미국 포크계를 장악했는데도 노숙자로 살다 떠난 잭슨 C. 프랭크의 대표곡이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망각의 슬픔을 몽롱하게 풀어낸 로워리 감독은 범죄 수법이나 액션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저무는 생애와 떠도는 삶을 보는 눈길이 따뜻하다. 쥬얼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 비루한 현실과 권태로운 일상에 치인 이들을 위로한다. “모든 게 행복하다고 믿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깨닫는 거예요. 아닐 수도 있겠다고.” “계속해서 가야죠. 자기 인생을 살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터커의 범죄를 형이상학적 풍류로까지 치켜세울 수는 없겠지만 즐거운 중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할리우드 전설이 건네는 작별 인사는 예상을 뒤엎는다. 비장하거나 엄숙하지 않다. 카메라 뒤편에서 지휘할 모습을 기대하라는 신호로 비친다. 부디 건강하시라. ? ???????????????????????????????????????????????????? 글. 영화평론가_ 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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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부르다 내가 죽을 그 이름.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

[칼럼] 사랑, 부르다 내가 죽을 그 이름. 영화 <필름스타 인 ...

무엇을 두려워하랴. 차이를 딛고 하나가 되는 기쁨.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내달릴 뿐이다. 영국 출신 폴 맥기건이 연출한 <필름스타 인 리버풀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의 두 연인을 보며 시 한 편을 떠올렸다. “기차의 육중한 몸체가 순식간에/ 그대 몸을 덮쳐 누르듯/ 레일처럼 길게 드러눕는 내 몸/ 바퀴와 레일이 부딪쳐 피워내는 불꽃같이/ 내 몸과 그대의 몸이/ 부딪치며 일으키는 짧은 불꽃/ 그대 몸의 캄캄한 동굴에 꽂히는 기차처럼/ 시퍼런 칼끝이 죽음을 관통하는/ 이 지독한 사랑/ 내 자궁 속에 그대 주검을 묻듯/ 그대 자궁 속에 내 주검을 묻네.” (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 필름 스타란 할리우드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1923 ~ 1981)을 가리키며, 리버풀은 비틀즈와 축구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항구 도시. 범죄 스릴러 <리얼 맥코이>에 경비원으로 잠깐 얼굴을 비친 피터 터너라는 배우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수입사가 토막을 낸 본디 제목엔 무슨 의미가 담겼을까. 회고록에 따르면 동명의 책 제목은, 상심에 빠진 저자를 동료가 다독여 주는 말이었다고 한다. “스타 배우는 리버풀 같은 동네에선 죽지 않아.” 가볍지만 진심어린 위로.? ? 할리우드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면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반갑게 다가올 이름이다. <오클라호마>와 <지상 최대의 쇼>로 노래와 춤을 뽐냈지만, 범죄 영화에서 갱스터의 음모에 가담하거나 남의 집안을 파탄내는 게 글로리아의 전공이었다. <고독한 영혼>에서 험프리 보가트를 얼이 나가도록 흔들었고, 커크 더글라스와 라나 터너를 앞세운 <악당과 미녀>에서는 시나리오 작가의 바람기 많은 아내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따냈다. 무엇보다 요부 연기로 애간장을 녹인 <빅 히트>를 빼놓을 수 없다. 요염하면서도 앙칼진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아 마땅하다. 글로리아는 니콜라이 레이 감독을 비롯해 네 남자와 차례로 가정을 꾸렸는데, 네 번째 남편의 정체는 입에 담기가 조금은 민망하다. 그런데 폴 맥기건 감독은 도덕론자들이 개탄할 스캔들을 실명까지 밝히며 짓궂도록 까발린다. 화려한 남성편력, 그래서 마지막 사랑이 더 소중하고 맹렬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스틸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이력을 다진 맥기건 감독은 엽기적 상상력이 만개한 옴니버스 영화 <케미컬 제네레이션>을 선보인 뒤 스릴러 장르만 시원찮게 파고들더니 BBC 드라마 ‘셜록’ 시리즈로 감각을 되찾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준비하는 분장실. 빅 클로즈업으로 잡힌, 주름살도 아름다운 입술 모양이나 섬세한 손놀림만으로도 주인공의 경험과 능력을 짐작하게 한다. 글로리아 그레이엄 (아네트 베닝)은 한때는 팬덤을 거느릴 만큼 유명한?배우였으나 지금은 ‘썩어도 준치’ 신세로 연극 무대를 기웃거린다. 1981년 리버풀. “그대 날 떠나 멀리 갔지만 난 계속 살아가겠지. 나에겐 울 시간도 없으니까.” 어둔 밤길에 내려앉는 ‘소울 퀸’ 어마 토마스의?노랫말이 심상치 않다. 형에게 야유만 받는 풋내기 연극배우 피터 터너 (제이미 벨)에게 우울한 소식이 날아든다. 쇠약해진 몸으로 나타난 글로리아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이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적막한 공간을 슬그머니 빠져나간 카메라가 기억의 문을 하나씩 여닫는다. 농염한 56세 여성과 한껏 들뜬 28세 사내는 어떻게 체온을 높일까. 마음 가는 곳에 몸도 가는 건가. 몸이 머무는 곳에 마음도 머무는 건가.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와 카렌 린 고니가 과시한 디스코 댄싱을 땀이 베이도록 따라하는 두 사람. 관능의 온도를 재고 싶을 지경이다. 연애 초반 데이트에는 공포 영화가 특효라는 건 익히 아는 사실. 영국의 대문호가 창조한 비련의 캐릭터는 복선으로 놓인다. ? 시간을 되돌리는 수법이 흥미롭다. 자르거나 이어붙이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현재와 과거를 매끄럽게 넘나든다. 날짜와 장소를 자막으로 알려주지 않았으면 헛갈릴 정도니까. 특히 거실 문이나 복도를 이용한 플래시백 솜씨가 그만이다. 새로운 형식은 아니고 할리우드 클래식의 인용이자 존경을 바치는 의도로 읽으면 된다. 배경을 투사하는 수법을 비롯해 글로리아가 자신이 출연한 <벌거벗은 알리바이>에 반응하는 모습이나 말리부 해변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리버풀과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풍광이 로맨스를 다채롭게 물들인다. 우리말 발음도 어려운 ‘색줄멸(grunion)’은 10cm 길이에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로, 캘리포니아 밤바다를 뒤척이는 묘기가 장관을 이룬다. 올드팝을 중심에 둔 음악은 드라마의 결을 잘 살린다. <중경삼림> 덕분에 널리 알려진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라틴팝의 대부’ 호세 펠리치아노의 낭랑하고 스산한 목소리에 담긴다. 꿈꾸는 자의 희열로 때로는 꿈이 꺾인 자의 비통함으로 흐르는 선율. <빌리 엘리어트>의 소년과 발레 선생님이 17년 만에 아들과 어머니로 호흡을 맞춘다. 뜨겁고도 애잔한 제이미 벨과 배려심 많은 줄리 월터스. 성큼성큼 잘 자란 배우와 곱게 늙는 배우를 보는 일은 즐겁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한 마디로 아네트 베닝의 영화다. 무르익었다는 진부한 표현 외에 달리 묘사할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쌓아온 관록은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증거이겠다. ? 히치콕 감독이 그랬다. “드라마란 지루한 것들을 잘라내버린 인생” 이라고. 글로리아와 피터의 관계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해서 지루할 틈이 없지만, 가혹한 운명에 매이면서 두 사람은 더는 드라마를 쓸 수가 없다. 병든 애인을 둔 사내가 무대에서 간호사 역을 맡아 웃음을 끌어내야 하는 인생사의 아이러니. 세 치 혀는 잘 못 놀리면 비수가 되는 법이어서 피터가 내지르는 말들은 보는 이들 마음까지 찔러 후빈다. 각각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같은 장면을 거듭 보여주는 수법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다투는 까닭을 밝히거나 ‘정 떼기’ 작전이라는 점에서 무리수로 보이진 않는다. “아낌없는 내 마음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사랑 또한 깊어요. 많이 줄수록 많이 갖게 되죠, 둘 다 무한하니.” 셰익스피어 비극의 달콤한 첫 키스가 이토록 숙연하게 비친 적이 있었을까. 아름답되 처연한 작별 인사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회고록을 펴낸 피터 작가가 카메오로 깜짝 출연하는데, 궁금하더라도 아예 관심을 접는 게 좋다. 환상이 깨질 수 있으니까. 아네트 베닝의 마지막 모습은 ‘올해의 표정’ 상패라도 안겨주고 싶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영상과 환청으로 꽂히는 사운드, 영욕의 세월, 회오와 무상, 흘러가고 스러지는 삶 그리고 마음 속 외마디. 내가 부르다 죽을 그 이름, 사랑이여.? ? 글. 영화평론가_ 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 작성일 201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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