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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할퀸 개인과 가족 /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칼럼] 시대에 할퀸 개인과 가족 /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전설로 남은, 개봉 자체가 기적인 대만 영화. 아시아 영화를 거론할 때 영화 매체와 전문가들이 항상 걸작 목록에 올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A Brighter Summer Day)>이 마침내 극장에 걸린다. 대형 복합상영관들이 낙동강 황소개구리 포식하듯 스크린을 독점하는 현실에서 이런 일은 횡재나 다름없다. 감격에 겨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다. 1991년에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자그마치 236분이며 연출을 맡은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느 수입업자가 관심을 갖겠는가. 아무튼 도난당한 골동품처럼 속을 태우던 영화가 불쑥 나타나 15세이상 관람가로 등급 분류를 마쳤으니 관객들과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고령가란 대만 타이베이의 지역 이름이고 소년은 새파란 열네 살.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의 노랫말에서 차용한 영어 제목이 쓸쓸하고 아련하다. “당신의 기억은 어느 눈부신 여름날에 머물러 있나요?” 로큰롤 멜로디는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시대의 공기는 숨통을 죄며 끈끈히 달라붙는다. ? ? 대만에서 최초로 일어난 미성년자의 살인을 소재로 삼은 영화지만, 범죄를 파헤치기보다는 배경과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에 대만 현대사를 알고 감상하는 게 좋다. 유혈 진압으로 3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1947년의 2·28사건, 1949년부터 38년 동안 이어진 세계 최장의 계엄령, 철혈 정치와 총통제. 명나라 시절부터 자리 잡은 ‘본성인’과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외성인’의 대립과 갈등. 격랑의 시대를 헤쳐 온 우리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다.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베이에 수도를 정하고 ‘중화민국’ 정부를 세운 뒤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다. 하지만 정당이나 단체 설립을 허용하지 않는 일당 독재에 우익 세력의 폭력, 이른바 백색 테러가 난무했다. 여기에 평화 회담을 주장하거나 민생 문제 개선이며 민주화를 요구하면 용공 분자로 몰려 곤혹을 치렀다.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영화에 새 물결을 일으킨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슬픈 역사에 깃든 어느 가정의 수난과 몰락을 풍경처럼 묘사한 <비정성시>(1989)로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 누군가의 손이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을 켜자마자 그 불빛을 삼키는 시뻘건 화면과 제작사 이름. 첫 장면의 야릇한 기운은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 손전등으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방황과 악몽으로 채워진 청소년기를 떠올린다. “부모 세대는 자식의 안녕을 바랐지만, 학생들은 불안한 미래로 인해 갱단을 조직해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며 생존 의지를 키워나갔다.” 1960년,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타이베이로 이사 온 소년은 장첸이라는 본명보다 2남 3녀 중 넷째라는 뜻에서 샤오쓰로 불린다. 일류 대학에 입학한 큰 딸과 독실한 크리스천 둘째 딸, 어리광을 부리는 막내딸과 다르게 두 아들은 골칫거리인 집안이다. 전당포를 들락거리며 도박 당구에 빠진 큰 녀석이나 시험 성적이 시원찮아 야간 중학교로 떨어진 작은 놈이나 속 썩이는 건 비슷하다. 밤이면 건달들과 어울려 쏘다니기 바쁜 샤오쓰는 또래 소녀 샤오 밍과 사귀는데, 그녀가 도피 중인 폭력단 두목의 연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켕긴다. 집에서는 아직도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존 웨인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고 있으며,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은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한다. 토박이 주민들에게 국민당 정부는 침입자이자 지배자로 군림한다. ? ? 어느 한 장르로 묶기 어려울 만큼 폭과 깊이가 넓고 깊다. 사건 하나로 개인에서 가족과 이웃, 사회와 국가까지 녹여낸 서사 구조는 어지간한 소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탄탄하다. 감독은 기록자의 눈길로 담담하되 끈질기게 샤오쓰와 이웃을 바라본다. 샤오쓰의 풋내 나는 사랑도 흥미롭거니와 둘을 에워싼 이들은 개성도 뚜렷하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여성 가수를 흉내 내는 땅꼬마 켓, 장군 아버지를 둔 데다 칼부림한 경력으로 압도하는 샤오마, 약삭빠르게 상대 폭력단으로 옮겨가는 친구도 있다. 가장 독특한 인물은 소공원파의 큰형님 허니이다. 대만 국가가 나오자 부동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걷는 뱃심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무협 소설로 소개해 동생들을 주눅 들게 하는 카리스마. 그래서 그의 최후는 허망하고 당혹스럽고 조금은 우스꽝스럽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를 캐터필러로 뭉개버리는 탱크 행렬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공기. 혼란과 불안, 단절과 고립, 소외. 공부보다 주먹에 익숙해진 아이들답게 어른들 뺨치는 복수전을 벌인다. 칠흑 같은 어둠과 거센 빗줄기, 섬광처럼 번득이는 동작과 튀는 핏물, 외마디 비명. 세계 범죄영화 항목에 ‘청소년 갱스터 무비’를 추가해도 좋겠다. ? 육체와 정신을 송두리째 짓이기는 권력의 야만성. 회유와 조작, 거짓 자백, 누군가를 엮어야만 내가 풀려난다. 백열등과 얼음덩어리, 텅 빈 공간과 퀭한 눈빛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샤오스의 아버지를 취조하는 사내는 주먹질은커녕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나긋나긋하고 때로는 속삭이듯 심문하더니 쉬는 시간엔 오르간을 연주하며 당나라 시인처럼 흥얼거린다. “창문 밖 비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니/ 오랜 근심과 고뇌가 머릿속에 계속 맴도네./ 꽃거울에 비치는 수척한 얼굴/ 펴지지 않는 주름살.”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떠오른다. 나치 친위대 장교로 집단 학살을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포악하거나 광기를 지닌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가족에겐 자상했으며 모든 면에서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렌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점”에 악의 평범성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평범성, 다시 말해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는 것이다.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 국정농단 조역들의 변명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켰으니 따랐을 뿐이다.” 라는 미련하고 뻔뻔한 진술. ? 교실 밖에선 텁텁한 습기를 내뿜지만 수업 중엔 이따금 웃음이 터진다. 틀린 답안까지 베껴 쓰다 들통 난 학생, <山>과 을 비교하며 한자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교사. 28자밖에 안 되는 알파벳이 수모를 당한다.?로이 오비슨의 를 비롯해 , , 등 감미로운 옛 팝송은 분위기 조성에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소년들의 삶을 엮고 인물들의 관계를 잇는 구실을 한다. 극장에서 아이들의 얼굴에 음향으로 처리한 장면은 하워드 혹스 감독의 <리오 브라보> 마지막 총격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두 번에 걸친 자전거 동행은 슬프도록 막막하다. 커닝했다는 누명을 쓴 아들을 아버지가 다독인다. “네 꿈은 네가 만드는 거야. 노력하기에 달렸지.” 두 번째는 실직당한 아버지를 퇴학 맞은 아들이 위로한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말씀 다 기억해요, 그대로 할 게요.” 그들 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영화는 가망이 없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외로움을 달래거나 두려움을 떨쳐내던 샤오쓰의 손전등. 카메라는 촬영장에 되돌아간 손전등을 클로즈업한다. 빛이 꺼졌으니 어둠이 덮칠 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인간과 파렴치한 인간이지.” 라는 대사가 심상치 않다. ? ?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소년은 믿었지만 소녀는 믿지 않는다. 곁에서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믿기 어렵다. 변하지 않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과 인간 앞에서 소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에필로그와 엔딩에 담긴 의미는 곱씹어볼 만하다.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엘비스 노래 녹음테이프. 아이들이 선망했던 문화의 무기력한 퇴장이다. 도입부와 똑같이 반복하는 라디오 멘트. 대학 합격자 명단이 줄줄이 흘러나오자 아들의 교복을 빨랫줄에 널려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실린 이름 하나 하나는, 소리굽쇠가 공기를 진동시켜 공명하듯 귓가를 맴돌다 환청으로 감긴다.?난폭한 시대와 희생자를 기억하라, 추모하라, 기억하라. 주인공 샤오쓰와 같은 나이에 샛별로 데뷔한 장첸은 이후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와 <일대종사>,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김기덕 감독의 <숨>에 출연하면서 이력을 쌓았다. 작년 제53회 금마장 영화축제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제작 25주년을 기념해 출연자들이 거의 다 모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기념 영상에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영원성, 좋은 영화는 세월을 이긴다. 좋은 영화는 제작진이 만드는 게 아니라 관객이 만든다.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홍보용 사진을 게시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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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영화로 세상을 이해하다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

[칼럼] 소년, 영화로 세상을 이해하다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

내용을 압축해 지은 우리말 제목이 근사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풍년가를 부를 정도로 쏟아진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회고와 증언, 추적과 고발 같은 다양한 형태로 시대와 인간을 돌아보게 했는데, 감동을 받거나 강요에 지치거나 의외성에 놀라는 등 관객들의 반응과 완성도에서 편차가 심하다. 소재를 광맥에 비유한다면, 쉽게 발견했어도 캐고 갈고 닦기가 어려운 게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Life, Animated)>의 카메라는 20년에 걸쳐 영화를 사랑하는 주인공과 사랑이 일군 기적들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앞질러 말하면 ‘올해의 실화’ 상 하나쯤 안겨줘도 좋을 만큼 인물도 사건도 생생하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즐겁게 동업하는 데다 낮고 간결한 목소리로 큰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각별하게 느껴진다. 어느 상황에서도 진심은 통하게 마련인가. 저작권에선 깐깐하다 못해 괴물로 소문난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자비로운 장사꾼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디즈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네 영상을 사용하게 했을 뿐 아니라 소유권과 편집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 비디오 영상에 담긴 서스킨드 부부와 두 아들.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본보기로 비치는 첫 장면이다. 특히 막내둥이 오웬은 깨물어주고 싶도록 앙증맞게 뛰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오웬의 모습이 펜으로 윤곽만 강조한 흑백 애니메이션으로 바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폐증을 가리키는 영어 ‘autism’은 ‘자신’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어 가치중립적이지만, 우리말 ‘자폐’는 ‘스스로 닫다’로 풀이된다. 자의적 고립이라?못을?박은?건가. 자폐증은 사회적 상호 작용 장애와 커뮤니케이션 장애, 제한된 관심과 행동의 반복이 증세로 나타나는 발달장애로, 완치는 어렵지만 두 살 이전에 치료를 시작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세 살 난 오웬이 피터 팬을 맡아 후크 선장 아버지에게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자폐증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토록 씩씩한 아이가 그림자만 남겼으니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버지가 그날을 떠올린다. “누가 우리 아들을 납치한 거 같았죠.” 영화는 서스킨드 부부를 비롯해 의료진과 사회복지사의 인터뷰, 비디오 클립과 갖가지 스케치 영상을 단서로 그림자를 쫓는다. ? 네 살 무렵 오웬이 내던진 <인어공주>의 대사 한마디는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1년 만에 부모와 눈을 마주친 아들은 또다시 혼자서 횡설수설에 비틀비틀. 의사의 진단대로 들은 말을 따라하는 ‘반향 언어’에 그친 걸까. 깜깜한 4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오웬이 투덜거린다. “월터 형은 피터 팬처럼 어른 되길 싫어해요.” 기적이자 신비였고 빛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웬은 사라진 게 아니고 영화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디즈니 영화를 가이드로 삼아 세상을 구경하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 팬은 디즈니 영화 나라를 상징하는 캐릭터라는 점도 흥분을 자아낸다. 오웬처럼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째로 외운 가족들은 영화 대사로 오웬과 말문을 트고, 아버지는 아들의 연기 파트너로 나선다. 그때를 회상하며 아버지가 <알라딘>의 사악한 조수 이아고를 온갖 과장된 표정으로 재연하는 장면이 눈물겹다. 타인과의 교류가 어려운 장애여서 가족의 사랑으로만 감싸야하는 나날. 부모들이 겪는 아픔과 인내, 수고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 ?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내용을 굳이 나눈다면 전반부엔 어린 오웬 모습에 부모의 탄식과 소망이 겹치고, 후반부는 대학 졸업을 앞둔 오웬이 독립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을 따라잡는다. 청년 오웬은 디즈니 영화 감상회를 주관하며 여자 친구도 사귀고 직장을 구하려 다닌다. 어린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23살 청년과 극진한 사랑으로 격려하는 가족들을 보는 일은 즐겁다. 조바심이 나지도 않거니와 측은한 마음이며 동정어린 시선 따위는 얼씬도 못한다. 세상 문을 두드리는 오웬의 손길을 잡기 위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와 <신데렐라>, <정글북>과 <피노키오> 등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15편이나 띄운다. 꿈과 희망, 설렘으로 유년기를 물들인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건 행운이다.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란 자폐 증세와 함께 절대 음감과 기억력, 암산과 미술 등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더스틴 호프만이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챙긴 <레인맨>과 샤룩 칸이 자폐아를 연기한 인도 영화 <내 이름은 칸>은 그런 특성을 적절히 활용했다. 이에 견줘 오웬의 빼어난 그림 솜씨는 천재성이라기 보다는 격정이자 고요한 내면 풍경으로 봐야 한다. ? 어릴 적부터 오웬이 몰두한 작업은 디즈니 영화의 인물들을 스케치북에 옮기는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영웅보다는 그를 보좌하는 들러리(Sidekick)를 그렸다. ‘일곱 난쟁이’의 활약이 말해주듯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들러리들은 대부분 유쾌하고 짓궂은 성격이어서 공주와 왕자, 미녀와 야수, 숙녀 강아지와 건달 강아지 같은 커플들의 중매자로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런 익살스런 감초급 캐릭터들을 미로로 보내고 뒤쫓는 이야기가 오웬의 서명도 뚜렷한 <길 잃은 들러리들의 땅 (The Land of the Lost Sidekicks)>이다. 로저 로스 윌리엄스 감독은 프랑스의 애니메이터들과 함께 그 오묘한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처럼 요동치는 굵고 어두운 붓질로 불안과 공포를 묘사하더니 점점 밝고 아름다운 풍경과 인물들로 채워나간다. 귀기서린 몰골의 악당은 오웬이 마주했던 도전에 상응하는 것이고, 악당의 파워는 오웬의 자폐를 상징한다는 윌리엄스 감독의 해설은 흥미롭다. 비디오테이프를 빠르게 되감는 듯한 음향에 오웬의 혼잣말을 입힌 것도 그런 이유일 터이다. 감독이 가장 공들인 들러리들의 이야기는 세계 어느 단편영화제에서도 박수를 받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 ? 이들 가족에겐 타인들의 시선도 무겁지만 시간은 더욱 짓누르며 흘러간다. 언젠가는 아이와 이별해야 하는 절박함과 두려움.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소원은 딱 한가지이다. 자식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사는 것. 그런 걱정에 마음이 무거운 형 월터를 보면 오웬은 외롭지는 않을 듯싶다. 상처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가. 잠 못 이루는 오웬이 어머니를 깨운다. “왜 인생은 부당한 고통과 비극으로 차있어요?” “산다는 건 늘 그래왔고 늘 그럴 거야.” “그럼 진실을 마주하고 영원히 슬퍼해요?” “아니, 영원하진 않아. 그냥 진실을 마주하고 견디면 차차 나아지지.” 며칠 사이에 성큼 자란 듯한 오웬이 프랑스 학회의 초청을 받아 강단에 오른다. 자폐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열정을 이용해서 세상을 이해하는가. 오웬은 <노틀담의 꼽추>의 종치기 콰지모도를 인용해 질문에 답한다. 당당하고 힘차고 아름다운 연설은 이 영화가 남기는 교훈과 위로이다. 텅 빈 극장에서 <라이언 킹>과 마주하는 오웬. 지난날에 머문 곳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었으며, 이제 세상과 애니메이션은 다르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터이다. 왕국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산을 오르는 심바 왕자처럼 오웬에게도 등정할 일만 남았다. ? 서울 어느 지역에서 장애아 부모들이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고 울면서 설립을 호소했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부끄럽고 황당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 님비(Not In My BackYard), 다시 말해 지역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지난 15년 동안 서울에 새로 생긴 특수학교는 하나도 없다.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는 전국을 통틀어도 7곳에 그친다. 장애인 학교를 혐오 시설로 몰아붙이는 나라가 또 있을까. 혐오시설이라니, 그 아이들이 ‘불가촉천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미성숙한 사회, 문화후진국을 자처하는 판에 헌법의 평등 정신을 거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누기는커녕 주어진 기회마저 빼앗는 건 만행에 가깝다. 오웬 서스킨드를 세상 속으로 떠민 것은 디즈니 영화지만, 가족의 사랑과 이웃의 배려도 큰 힘이 되었다.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은 사랑스런 청년의 앞날을 응원하게 만들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죽비처럼 내리친다.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이미지를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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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향기 세기의 우정, 영화 <빅토리아 & 압둘>

[칼럼] 인간의 향기 세기의 우정, 영화 <빅토리아 & 압둘>

“이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실화임(Based on real events... mostly).” 영국과 미국이 함께 만든 <빅토리아 & 압둘 (Victoria and Abdul)>의 첫 자막이 궁금증을 한층 높인다. 기반을 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체가 실제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목 ‘빅토리아’는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1819 ~ 1901)을 가리키는데, <대통령의 편지>로 널리 알려진 전기 작가 스탠리 웨인트럽은 역사가의 시선을 곁들여 기술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국민의 애정과 전통에 대한 동경, 충성심 높은 중산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된 의례적인 군주제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녀는 영국 그 자체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왕족과 인연을 맺어 ‘유럽의 할머니’로도 불린 그녀의 재위 기간 63년 7개월은 ‘빅토리아 시대 (Victorian Era)’라 통칭한다. 권력의 대표자였지만 권력자는 아니었던 여왕.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다시 말해 군주로서 위엄과 권위만 가지는 영국 왕실의 전통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 ? 의회 민주주의와 산업혁명,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대로 영국은 19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들의 동인도 회사가 무갈 제국을 무너뜨리자 빅토리아 여왕은 24년 동안 인도 여제를 겸하게 되는데, <빅토리아 & 압둘>은 그녀가 황제로 등극하는 시점에서 화면을 연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은 영국 영화를 꽃피운 두 원로 배우를 버킹엄 궁전으로 보내 권위와 품위에 가려진 여왕의 고뇌를 들여다본다. <더 퀸>(2006)에서 엘리자베스2세를 연기한 헬렌 미렌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이번엔 더 연로한 주디 덴치를 빅토리아 여왕에 올린다. <미세스 브라운>(1997)에 이어 두 번째로 빅토리아 역을 맡은 덴치는 영화 후반에 흔들고 헐뜯기에 골몰하는 신하들을 매섭게 꾸짖는다. “내 나이는 81세야. 9명의 자식과 42명의 손주를 뒀고 십억 가까운 인구의 통치자지. 지금껏 11명의 총리를 거치며 2,347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어. 나는 다섯 개 왕실의 책임자이고 거느린 식솔은 3,000명이야.” ? 1887년, 타지마할 왕궁으로 유명한 인도의 아그라. 한때는 무갈 제국의 수도였던 그곳 교도소에서 일하는 압둘 카림(알리 파잘)은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로 영국행 선박에 오른다.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년을 기념하는 주화를 헌정하기 위해서이다. 여왕이 일곱 코스 요리를 다 맛본 뒤에야 비로소 알현하게 된 압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호기심 많고 능청스 런 태도가 밉지는 않아도 왠지 불안해 보인다. 눈도 마주지치 말라는 지시를 어기고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으니 압둘은 불경죄로 군법회의에 넘겨질 일만 남았다. 하지만 여왕이 슬쩍 던진 한 마디는 전화위복이자 인생역전. “키 큰 친구가 무척 미남이더군.” 전속 시종 자리를 꿰찬 압둘과 그를 어여삐 여긴 여왕의 대화가 싱그럽다. “인생은 카펫 같아요. 씨실과 날실을 엮어 무늬를 만들어가죠.” “자네는 시인이군.” “아뇨, 죄수 명단을 작성하는 서기입니다.” “우린 다 죄수라네.” 신분과 국적을 뛰어넘은 우정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 ? 런던 대박람회를 개최해 산업혁명으로 이룬 진보를 과시한 영국이지만, 나라 밖에서는 아일랜드 사태와 수에즈 운하, 보어족의 독립 전쟁과 줄루랜드 합병, 세포이 항쟁 등 식민제국으로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사도 뒷목을 잡게 할 일이 적잖았다. 남편이자 조력자이며 도덕군자인 앨버트 경은 30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식들은 애물단지로 다가온다. 게다가 주변엔 출세하려고 아첨이나 떠는 족속들이 득시글거린다. ‘뚱뚱하고 굼뜨고 멍청한 할망구’라 자조하는 여왕에게 머나먼 식민지 청년이 친구이자 위로자로 등장한 것이다. 가장 빛나는 시대가 배경이지만 영화는 풍광이며 의상, 건물과 장식의 화려함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와이트 섬과 스코틀랜드 벨모럴 성을 거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잠깐 들렸을 뿐 카메라는 대부분 궁전 안에 머문다. 영국 출신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은 그동안 도시 빈민과 노동자, 이민자, 동성애자, 18세기 파리 귀족사회 등 장르와 소재를 폭넓게 취하면서 정확하고 공정하게 사회상을 묘사했다. 그는 이번엔 두 사람의 통통 튀는 문답식 대화를 통해 역사와 시대,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 웃음은 ‘감지된 허망’에서 온다고 베르그송이 말했던가. 웃다보면 서늘해지는 대사들이 꼬리를 문다. 양털로 짠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 킬트. “무척 까끌거리네요.” “스코틀랜드 것은 다 까끌거려. 딱 질색이야.” 잉글랜드와는 수백 년 앙숙 관계. 무갈 제국의 샤 자한 왕이 14번째 출산하다 죽은 왕비를 위해 22년에 걸쳐 완성한 타지마할 궁전. “샤 자한 황제는 어떻게 되었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죽었죠.” “자식들은 다 못됐어.” 그 아비나 내 처지나. “묘비명은 ‘세상을 버리고 영원의 연회장으로 떠나다’입니다.” “아는 게 많군.” “우타르 프라데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때론 코란 구절을 인용해 숙연하게 만든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지” “소명 때문에 사는 거죠. 우린 자신을 위해 세상에 온 게 아닙니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죠.” 푸치니 등장과 <피나포어> 오페라타 열창, 샴페인 과음과 왈츠, 총각과 유부남, 당혹감과 배신감, 부르카와 수태 진단, 고대 페르시아 연극 소동 등 어떤 소재를 다뤄도 유머와 위트를 놓치지 않던 프리어즈 감독의 코미디 감각은 여전히 빛난다. ? 제목대로 빅토리아와 압둘의 관계, 그야말로 ‘세기의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다.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무슬림이 쓰는 우르두어를 배우고, 인도의 천한 평민 사내를 영적 스승인 문쉬 (Munshi)로 삼으며 심지어 작위까지 수여하려 한다. 압둘은 여왕에겐 충직하고 현명한 친구이지만, 귀족들에겐 그저 ‘인도 쓰레기’일 뿐이어서 쓰레기를 치우려는 이들의 시선은 점점 살기를 띤다. 누군가는 “갈색 피부로 환생한 존 브라운” 이라 야유한다. 앨버트 경이 죽은 뒤에 만난 존 브라운은 여왕의 마부로, 둘 사이는 ‘낭만적 불륜’이라는 등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주디 덴치는 83세였다. 155㎝의 키와 평범한 외모에 갈라진 목소리 등 배우로선 불리한 조건이 많았지만, 이제 덴치 연기는 권위와 위엄, 카리스마를 상징할 정도로 인장이 또렷하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엘리자베스 1세 연기는 8분 출연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까. 007 시리즈 23번째인 <스카이폴>에서 주디 덴치는 자신의 연기론을 몸 전체로 스크린에 녹여낸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공포심이 커진다. 그런데 이 공포심에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빅토리아 & 압둘>은 80대 어른 주디 덴치의 아름다운 영화이다. ? 삶은 주목받을수록 더 고달픈가. 치열하고 피로하고 공허한 게 인생 여정인가. 10억 인구를 거느린 여왕이 탄식한다. “다 훌훌 털어버리고 시골 촌부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 문학의 어머니였던 두 작가도 비슷한 심경을 토로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박경리의 시 <일 잘하는 남자> 일부). “죽기 전에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그까짓 마당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나 혼자 먹고살 만큼의 농사를 짓고 살고 싶다. 세금 걱정도 안하고 대통령이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살고 싶다.”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이른바 팩션(Faction) 사극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말이 좋아 퓨전 (Fusion)이지 역사의 외피를 두른 채 왜곡하고 과장하기 일쑤이고 때론 날조에 가까운 사건도 끼워 넣는다. <빅토리아 & 압둘>은 화려한 볼거리에 집착하지 않으며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시대상을 복원하는데,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그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겠다. “어릴 땐 죽음을 동경했는데, 살 이유가 없는 지금은 한 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 ‘영원의 연회장’ 입구에 선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젖는다. 여왕, 여성, 인간의 목소리.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이미지를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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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공포, 공존의 기쁨  영화 <덩케르크>

[칼럼] 고립의 공포, 공존의 기쁨 영화 <덩케르크>

영국과 미국, 독일의 감독 세 명이 연출한 <지상 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1962)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재현하며 ‘디데이(D-day)’의 어원을 알린다. 병사들 생애에 가장 긴 하루였던 현장을 복원한 영화는 부상당한 연합군 장교(리처드 버튼)와 시체로 거꾸러진 독일군, 헤매는 미군 병사를 한 곳에 모아놓고 명대사로 마무리한다. “그는 죽었고, 나는 불구가 되었고, 너는 길을 잃었다. 전쟁이란 항상 이런 거야.” 1944년 노르망디 작전과 1940년 덩케르크에서 실행한 다이나모 작전은 각각 전진과 퇴각이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전술이었지만, 둘 다 세계 전쟁사의 기록과 순위를 다툴 만큼 규모가 크고 희생자는 많았다. 역사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병사들이 덩케르크를 탈출하지 못했다면 노르망디 장악과 파리 탈환에 이어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까.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살아 돌아간 연합군이 33만 8,226명이었으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는 당시 전황을 알면 한층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 ? 1940년 5월 초, 폴란드를 삼킨 나치 독일은 베네룩스 3국을 연달아 손에 넣었다. 독일의 파죽지세 공격에도 방어가 최선이라며 마지노선을 친 프랑스는 느긋했고, 영국을 위시한 연합군도 벨기에 국경에 구축한 방어망만 믿었다. “보루에 틀어박혀 있으면 진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잊었을까. 마지노선의 북쪽 끝머리 아르덴 지역은 기어오르기도 벅찬 고원이자 삼림 지대였다. 하지만 독일 기갑 군단은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해 연합군의 뒤통수를 치며 포위망을 조여 갔다. 덩케르크 해안에 묶인 연합군은 숨을 곳도, 도망칠 수도 없는 궤멸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5월 24일 독일군에게 진격 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입에 문 사탕을 빼앗듯 공격을 멈추게 한 이유는 아직껏 수수께끼로 남는다. 히틀러의 정신 상태가 불안했다거나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등 추측과 가설만 무성하다. 나흘 뒤 히틀러가 명령을 철회했지만, 영국은 그 일주일을 틈타 어선을 포함한 선박 850척을 동원해 연합군을 본국으로 탈출시킨다. 유럽 현대사 아니 인류 역사를 바꾼, 천신만고 끝 기사회생이었다. ? 덩케르크의 살풍경은 속죄와 구원을 저울질한 영화 <어톤먼트>에 비쳤었다. 영국군 제임스 맥어보이를 뒤쫓는 카메라가 구호와 절규, 포연으로 뒤덮인 해변을 긴 호흡으로 담아냈다. <덩케르크>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발한 상상력과 다양한 장르 섭렵,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 뒤엎고 포개는 솜씨는 마술에 가깝다.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꾸게 하여 타인의 생각을 훔치더니 <인터스텔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풀어낸 5차원 공간에 가족애를 곁들인다. 디지털 시대에서도 필름과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는 놀란 감독이 처음으로 실화를 다룬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데다 대사 분량이 적고 상영 시간은 106분에 그친다. 이번에도 시공간 이동에 따른 서서 구조가 간단치 않은데, 초반에 한 눈 팔지 않으면 따라잡긴 어렵지 않다.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비율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서로 다른 화면 6개가 들쑥날쑥하는 건 인물들의 갇히고 쫓기는 심리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지만 조금은 방정맞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와 해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싸울 것입니다.” 엔딩에 들리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다짐대로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개 시공간에서 펼쳐진다. 첫 번째는 해변 잔교를 무대로 영국군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동료 병사들의 일주일에 걸친 사투를 그린다. 생존 본능 앞에 전우애란 쓸모없는 허풍이어서 너를 버려야 내가 산다, 는 흉포한 이기심에 짓눌린다. 병사들은 “생존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흰소리로 살의를 정당화하려 한다. 바다에서의 하루를 다룬 두 번째 시간대에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징발된 민간인 선박이 등장한다. 늙수그레한 선장 도슨(마크 라이런스)은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그가 살려낸 해군 (킬리언 머피)은 항로와 목표를 눈치 챈 뒤엔 미쳐 날뛴다. 세 번째는 영국군 조종사 파리어 (톰 하디)가 하늘에서 보내는 한 시간으로 짧지만 가장 맹렬하다. 영국 스핏파이어 트리플 편대와 독일 폭격기들의 공중전은 곡예처럼 아찔하고 불꽃놀이마냥 황홀하다.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아쉽지만 억울하지는 않을 터이다. ? ? ? 일찍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에서 선보인 다중 플롯, 여러 겹의 서술 방식은 퍼즐 조각 맞추기처럼 흥미롭지만 잔재주를 많이 부리면 피로감이 쌓인다. <덩케르크>의 3원화한 이야기 구성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트래픽>에도 나왔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아도, 길고 짧은 시간선을 수렴해 하나로 합치는 과정은 세공사의 손길처럼 섬세하다. 입체로 띄우고 평면으로 다림질하려는 걸까. 1일, 1주일, 1시간을 늘어놓거나 엇갈리게 하는 수법이 아주 정교해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처럼 느껴진다. 놀란 감독은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상황으로 묘사하고, 비주얼을 강조하기보다 음향에 공들인다. 밀폐와 고립이 자아내는 공포감. 감독의 오랜 파트너 한스 짐머가 조율하는 음악과 사운드 효과는 또 다른 주인공 노릇을 한다. 시계추 소리, 배의 엔진에 모터 소리가 뒤섞인 기계음이 상영 시간 내내 신경을 긁어댄다. 여기에 현악기 고음은, 여자의 내장을 잘라 바이올린 현을 만든다는 옛날 옛적 기괴한 소문처럼 머리칼을 곤두세운다. 피격과 추락, 특히 총알이 선체를 벌집으로 만들 때의 음향은 환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얼하다. ?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설정했기에 이분법 구도가 없으며 상황을 극적으로 부풀리지 않는다. 팔 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튀고 피가 쏟아지는 참혹한 전투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전투의 쾌감, 살육의 흥분을 맛보려는 이들이 지루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만하다. 실체 모를 그림자가 주는 위협이고 공포인가. 조종사를 제하곤 독일군들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지피지기’ 손자병법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연합군을 위협하는 것은 잠수함과 전투기, 총소리와 어뢰 같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두드러지는 캐릭터도 없는 데다 주요 인물 대다수가 신인들이어서 얼굴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친숙해진 배우 톰 하디도 마스크를 벗어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거듭 강조하지만, 연민으로 감싸거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병사들은 항복이든 전멸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기적은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오는 지도 모른다. ? 아날로그 감성으로 끌어낸 현장감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관객은 3인칭 관찰자가 아닌 1인칭 주인공으로 뛰어든다. 구경하기보다 체험케 하는 힘은 감독의 관록과 내공에서 온다. 탈초점 상태로 처리한 파리어의 마지막 모습과 17세 소년의 죽음을 기리는 기사를 눈여겨봐야 한다. 전쟁 영웅도 신화도 없다. 희생과 헌신이 있을 뿐이다. 귀환했어도 패잔병처럼 풀이 죽은 젊은 군인을 시민들이 반기고 위로한다. “그걸로 충분해!” 생존 드라마의 정점을 찍는 외마디다. 영국 출신 감독이 선조들의 사투를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관현악 변주곡 <님로드(Nimrod)>로 응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제 나라 병사 12만 명을 살려낸 프랑스로서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 수 있겠다. 누군가는 너무 자주 영국 만세를 부른다고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영국인들이 단결과 극복 의지를 다지는 ‘덩케르크 정신’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화 <덩케르크>를 공존의 기쁨, 인간 존엄의 찬가로 불러도 좋을 이유이다.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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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 그 도전과 활력의 여정 - 영화 < 잃어버린 도시 Z >

[칼럼] 탐험, 그 도전과 활력의 여정 - 영화 < 잃어버린 도시 ...

파라오 무덤 벽에 새겨진 푼트 원정대에서 출발한 탐험의 세계. 정글과 급류를 헤치고 미답의 영토로 나아간 탐험가 이야기는 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 ‘넓다’와 ‘길다’ 딱 두 마디로 정리되는 아마존 유역.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곳. 동식물 수 십 만종이 서식하는 생태계 보물 창고이자 지구의 허파. 태곳적 숨결과 신비. 그러나 때로는 ‘푸른 지옥.’ 톱날 이빨을 세운 재규어와 아나콘다, 피라냐. 목덜미를 겨냥하는 흡혈박쥐와 불개미, 진드기. 여기에 말라리아와 황열병, 변화무쌍한 날씨는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험악하고 척박한 자연 환경 탓에 아마존은 인류 문명이 존립할 수 없는 지구 최대 오지로 알려져 왔다.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원주민들이 이따금 발견되는데, 수렵과 채취에 의존한다고 해서 야만 종족으로만 취급할 일은 아니다. ? 2010년, 브라질과 볼리비아 접경지대의 열대 우림을 벌목한 곳에서 원형과 직사각형 형태를 띤 거대한 도형을 비롯해 도로와 수로, 울타리 등 지반 공사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도는 세계 고고학계를 뒤흔들었다. 현대 기술을 뺨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이 유적지를 놓고 멕시코 잉카 문명과 페루 아즈텍 문명에 버금간다거나 엘도라도(El Dorado)가 흘린 자국일지 모른다며 언론들도 한 목소리로 흥분했다. 정글 어딘가에 감춰진 집채만 한 황금 덩어리, 황금 가루로 씻고 바르는 제왕.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탐험가들이 눈이 멀도록 휘황한 나라를 찾으려 줄기차게 아마존을 밟았다. 하지만 대다수가 누렇게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되거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황금 제국을 ‘Z’라 부르며 3번이나 도전한 이가 영국인 코로넬 퍼시 포셋이었다. 그가 겪은 험난한 여정은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영화 <잃어버린 도시 Z(The Lost City of Z)>가 원작으로 삼은 동명 소설은 포셋의 탐험과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작가 데이비드 그랜 이야기가 번갈아 펼쳐진다. 일치감치 판권을 사들인 배우 브래드 피트가 제작을 맡았고, 카메라는 1905년부터 20년에 걸친 주인공의 탐험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 원작을 영화보다 먼저 읽든 나중에 읽든 상관이 없으며, 과정과 결말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어서 스포일러라 눈총 받을 구석도 없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폴란드 여성의 애환을 우아하게 묘사한 <이민자>에서 각각 연출과 촬영을 담당한 제임스 그레이와 다리우스 콘지가 다시 머리를 맞댔다. “죽음이 삶에 풍미를 더하지.” 사생관이 뚜렷한 육군 소령 포셋(찰리 허냄)은 왕립지리학회 지시에 따라 아마존으로 향한다. 고무 생산에 얽힌 볼리비아와 브라질의 분쟁을 해결할 지도 제작이 목적이지만, 한편으론 영국의 식민지 확대 야심을 드러낸 여정이기도 하다. 아내 니나(시에나 밀러)와 어린 아들 잭을 남겨둔 포셋의 원정길엔 과묵한 보좌관 헨리 코스틴(로버트 패틴슨)이 동행한다. ? 포셋이 목숨을 건 탐험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실추시킨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남자는 술과 도박에 빠지면 답이 없어.” 파송 담당자는 포셋 집안을 은근슬쩍 비웃으며 회유한다. 니나가 남편에게 챙겨준 시는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의 <탐험가 (The explorer)>. “...목소리가 양심처럼 끝없이 변하며 영원히 울려/ 밤낮으로 속삭일 때까지/ 가서 그 경계 너머를 보라/ 경계 너머 사라진 그 무엇인가를/ 그것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노라. 이제 떠나라!” 상황이 급변해 임무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는데도 포셋은 멈추지 않는다. ‘강의 청소부’ 피라냐의 공격이며 헛것이 보일 정도의 굶주림과 질병도 이겨낸다. 미국인 하이럼 빙엄이 안데스에서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발굴했다는 소식은 포셋의 경쟁심에 불을 붙인다. 우연히 쥐게 된 고대 토기 한 조각. 포셋에겐 Z로 가는 나침반이자 열쇠였다. ? 1830년에 설립된 왕립지리학회(RGS)는 찰스 다윈의 해양 탐사와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 에드먼드 힐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지원했다.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덕분에 학회 핵심층에 진입한 포셋은 토기를 증거로 고대 문명 소개에 열을 올리지만 회원들은 야유만 보낸다. 두 번째 기회를 얻은 포셋에게 남극 탐험 경력을 훈장처럼 매단 제임스 머레이가 밥상에 숟가락 얹듯 끼어든다. 탐욕스럽고 질투심도 많은 그는 아마존에 캠핑을 온 듯 번번이 포셋의 발목을 잡는다. 포셋 일행이 <여왕의 병사들>을 들려줘 식인종들의 식욕을 떨어뜨리는 장면엔 <미션>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주한 오보에 선율이 떠오른다. 머레이가 아마존을 미개한 지역으로 몰아세우지만, 포셋은 경외심으로 바라보고 원주민에겐 형제처럼 다가간다. 독선과 불만에 다투길 반복하다 패혈증에 걸린 머레이는 포셋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도 적반하장에 배은망덕이다. 2차 탐험이 실패로 끝난 건 당연한 결과다. ?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을 하던 독립운동가의 삶이 이랬을까. 탐험가로는 뛰어났지만 가장으로선 무능한 남자. 두 아이 출산 소식도 열대 우림 속에서 들었다. 훌쩍 자란 아들 잭은 먼 이웃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19세기 유럽의 시대 풍경은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장면에 잘 드러난다. “여자가 갈 곳이 아니야.” “우린 동등하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로서 내 소망을 생각해봤어?”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각자의 역할이 있어! 그게 우리 문명의 초석이야.” 가부장제에 억눌린 여성상이지만, 아내 역의 시에니 밀러가 낭비되었다는 평가엔 동의하기 어렵다. 화면 점유율은 낮아도 그녀는 들러리에 머물지 않으며 당당하고 자상하게 가족을 뒷바라지한다. 특히 그녀의 잠언에 가까운 지혜로운 대사는 어록을 만든다. “인간이 지각하는 범위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 “두려움이 미래를 결정하게 둘 순 없지.” “꿈을 잃지 않고 미지를 탐험하고 미를 추구하는 보람을 아는 아이로 키워줘.” ? 정글을 누비며 엘도라도를 찾아가는 내용이라면 긴박감 넘치는 추격전이 나올 법하지만, 화면은 스펙터클이나 역동성과 거리를 둔다. 판타지를 곁들인 신비스런 풍경도 담아내질 않는다. 모험 영화의 신나는 활극을 기대했다면 눈꺼풀이 무거울 수도 있겠다. 포셋의 탐험은 신념에서 길을 열고 활력으로 내딛는다. 원주민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손수건을 흔들어 악수를 청하는 장면은 순수와 열정의 도전 정신을 집약해 보여준다. 시적 표현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직선’ 으로 나가는 자세일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포셋은 전장에 나가 무공을 세운다. 탐험가로서는 눈에 치명상을 입었으나 기적처럼 회복한다. 3번째 탐험에 동행하는 이는 결코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던 아들 잭이다. 어릴 적에 자신을 나무라던 아버지의 훈계를 이제는 쇠약해진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며 힘을 북돋우는 아들 모습은 아프고도 아름답다. 니나도 남편과 아들을 험로로 힘껏 떠민다. “살면서 안전한 길만 택할 순 없지.” 탐험이라는 유전자를 지닌 가족. ? 포셋에게 Z는 유령 도시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의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이었다. 1925년 4월, 58세의 포셋은 한 달이면 고대 문명과 접촉할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편지에 이어지는 습격과 도피, 짧은 회상. 그리고 온 세포가 녹아내리는 환몽의 밤. 매듭을 짓지 않고 느슨하게 여정을 마무리하는 솜씨가 좋다. 소문에 소문을 타고 흐르는 세월. 아버지와 아들은 황금 제국에 입성했을까. 아니면 원주민들 족보에 편입해 자연과 하나 된 삶을 누렸을까. 20세기 탐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미스터리이다. “삶의 대부분은 미지의 영역이지.” 포셋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려주며 영화는 묻는다. 당신에게 미지의 영역은 무엇이고 어디인가.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이라면 모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도전과 활력, 혁신하는 삶. 당신 마음의 Z는 살아 꿈틀거리는가.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 내에 게시된 영화 홍보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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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액션의 진수, <원더 우먼> vs. <악녀>

[기타] 여성액션의 진수, <원더 우먼> vs. <악녀>

전 세계적으로 걸크러쉬가 트렌드인 가운데 최근에 볼 수 없었던 하드한 여성 액션 영화 2편이 극장가에 이슈가 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할리우드 영화 <원더 우먼>과 한국영화 <악녀>로, 여성 주인공이 강력한 액션을 선사하며 6월 극장가에서 남성관객은 물론 여성관객에게 호응을 받으며 인기를 얻고 있다. 패티 젠킨스 감독이 연출을 맡은 <원더 우먼>은 6월 첫 주말에 전 세계 2억3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역대 여성감독 영화로는 개봉 주말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서울액션스쿨 출신의 정병길 감독이 연출을 맡은 <악녀>는 지난 5월 열린 제70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아 상영 이후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 136개국에 선판매되는 이슈를 만들었다. 여성 액션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해봤다. ?■ 이전의 여성 액션 영화들? 할리우드에서는 이전에도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액션 영화들이 수시로 등장했다. 언뜻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툼 레이더> 시리즈와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의 <언더월드> 시리즈,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공각기동대>가 여성들의 강력한 액션을 보여줬다. 하지만 <원더 우먼>은 이들 영화보다 강력하고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반면 다양한 장르의 한국영화가 개봉하고 있지만 유독 볼 수 없었던 장르가 여성 액션 영화다. 그래도 하지원 주연의 <7광구>, <조선미녀삼총사>, 손예진 주연의 <해적: 바다로 간 산적> 정도가 여성 액션을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이중에서도 <7광구> 정도가 하드한 액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웬만한 남성 액션 영화보다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악녀>가 더욱 반갑다. ? ?■ <원더 우먼>과 <악녀>의 출발점 1941년 윌리엄 몰튼 마스턴의 코믹스 주인공으로 탄생한 ‘원더우먼’ 캐릭터는 그간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며 여성을 대표하는 슈퍼 히어로로 자리 잡았다.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TV에서 방송된 린다 카터 주연의 <원더우먼>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마블과 DC 등의 코믹스 슈퍼히어로에 빠져 있는 할리우드는 원조 걸크러쉬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원더우먼’ 역시 리메이크됐다. 한국 여성 액션 영화의 이정표가 될 <악녀>는 정병길 감독의 머릿속에서 시작됐다. 그는 여배우가 원탑인 액션을 하고 싶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그는 “할리우드나 홍콩에는 여자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 갈증이 있었다. 한국에 굉장히 좋은 여배우들이 많은데 여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가 기획되는 경우가 드물어서 더더욱 만들어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로망이었던 영화다”라고 말했다. ?■ <원더 우먼>과 <악녀>가 담은 이야기 <원더 우먼>은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유일한 아이이자 공주인 다이애나 프린스(원더우먼)가 최강의 전사로 훈련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다이애나 스스로 자신이 최강 전사임을 직감한 어느 날 데미스키라에 트레버 대위의 비행기가 불시착하게 된다. 트레버 대위를 통해 인간 세상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다이애나는 전쟁의 신 아레스가 인간 세상에 있다고 믿는다. 이에 아레스를 물리쳐 데미스키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낙원과 같은 섬을 뛰쳐나와 1차 세계대전의 지옥 같은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원작 만화는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원더 우먼>은 1차 세계대전 말이 배경이다. 배경 시기가 바뀐 이유는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의 투표권 쟁취 운동이 평화적 저항에서 무력 저항으로 바뀐 서프러제트가 있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강인한 원더우먼 캐릭터가 시대적 상황과 어울렸던 것이다. 또한 여성인 다이애나(원더우먼)가 생명의 존엄성과 인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당시의 시대정신과 부합했다. <원더 우먼>이 신화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데미스키라 왕국을 배경으로 시작한다면, <악녀>의 시작은 쓸쓸하고 삭막한 중국 연변이 그 시작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침대 밑에서 목격한 숙희는 복수의 칼을 갈며 연변에서 킬러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킬러로 키워준 남자 중상과 서울로 신혼여행을 오지만 그가 한 조직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홀연 단신으로 조직원 모두를 살해한 숙희는 한국의 국가 비밀조직에 스카우트되고, 최정예 킬러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숙희의 삶은 죽었다던 중상이 나타나면서 다시 핏빛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핏빛 액션이 계속되는 <악녀>이지만 그 안에는 액션 외에도 복수와 사랑, 배신의 드라마가 있다. 특히 아버지, 딸, 친구, 연인 등 숙희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으면서 제목처럼 ‘악녀’가 되어가는 숙희의 모습은 잔인하고 강력한 액션 속에서 안쓰럽게 느껴진다. ?■ <원더 우먼> 갤 가돗 vs. <악녀> 김옥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원더 우먼>이나 <악녀>를 보는 즐거움은 역시 두 여배우의 강력한 액션이다. <원더 우먼>은 지난해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원더우먼으로 살짝 등장했던 갤 가돗이, <악녀>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김옥빈이 캐스팅돼 멋진 액션을 보여준다. 2004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이스라엘 대표로 출전한 갤 가돗은 <분노의 질주: 디 오리지널> 이후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비롯해 <트리플9>, <크리미널>, <이웃집 스파이>, <나잇 & 데이>, <브로큰 데이트> 등에 출연하며 섹시 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쟁쟁한 여배우들과의 경쟁 속에서 <원더 우먼>의 주연 자리를 따냈다. <원더 우먼>에서 갤 가돗은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빗발치는 탄환을 뚫고 맹활약했고, 전쟁의 신 아레나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력한 아마존 전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촬영 전 9개월부터 1주일에 6일씩 웨이트 트레이닝과 심혈관 운동은 물론 양궁, 칼싸움, 승마, 무술 등의 액션 훈련을 받았다. 갤 가돗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멋진 사람들과 일했기 훈련은 힘들었지만 강하고, 건강해져서 원더우먼을 연기하기에 준비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원더우먼을 상징하는 빨강, 파랑, 금색의 의상과 칼과 방패, 채찍으로 무장한 갤 가돗은 원작의 원더우먼과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며 전 세계 관객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갤 가돗의 원더우먼은 올해 11월 개봉 예정으로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사이보그, 플래시 등 DC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가 모두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원더우먼이 상상 속의 슈퍼히어로라면 <악녀>의 숙희는 현실 속에서 성장한 최정예 킬러다. 그리고 <박쥐>, <시체가 돌아왔다> 등의 영화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 김옥빈이 한계를 뛰어넘는 액션 연기에 도전해 ‘숙희’라는 한국영화에 유례없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악녀>에서 마치 <아저씨>의 원빈이나 <용의자>의 공유와 비교해도 될 만큼 고난이도 액션을 소화한 김옥빈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태권도, 합기도, 권투, 무에타이 등 다양한 장르 운동을 조금씩 배웠다. 배우로 데뷔한 이후에는 클라이밍 등 익스트림 스포츠를 좋아했다. 재주는 익혔는데 쓸데가 없어서 아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악녀’ 시나리오가 들어와 더 나이 들기 전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준비된 액션 배우임을 강조했다. 준비된 배우라고 해도 전문 액션 훈련은 받아야 했다. 김옥빈은 촬영 2개월 전부터 매일같이 액션스쿨에 출근해 장검, 단도부터 권총, 기관총, 저격총, 심지어 도끼가지 수많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고난도 액션을 스스로 해낼 수 있었다. 특히 질주하는 차량에 매달리는 장면이나 위험천만한 오토바이 레이싱, 폐건물의 복도에서 펼쳐지는 수십 명의 조직원들과의 대결,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 등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액션에서 김옥빈은 빛난다. 그녀는 “촬영할 때는 최선을 다했고, 마치고 나서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꼈다”며 <악녀>를 자랑스러워했다. 칸영화제에서 상영 후 5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 글. 국제신문 기자_이원 사진. <원더 우먼> 스틸(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악녀> 스틸(NEW 제공)

  • 작성일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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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삶이여, 영화 <프란츠>

[칼럼]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삶이여, 영화 <프란츠>

짙푸른 수풀과 분홍빛 꽃가지를 얹은 카메라가 멀리 희끄무레하게 잡은 곳은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크베들린부르크.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성당과 성채를 비롯해 목조 주택이 늘어선 옛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중세 시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마을 한 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옥들은 나무 기둥과 들보 사이사이를 돌과 흙으로 메우는 하프팀버(반목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붉은 지붕이며 삐죽삐죽 내민 목골과 파스텔 색조 벽면은 블록을 쌓아 올린 장난감처럼 귀엽다.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요정들과 마법사가 하프 선율을 따라 광장과 골목을 날아다닐 듯한 풍경이다. 그런데 환상은 멀고 환멸은 가깝기 때문일까. 동화 나라에서 증오의 마을로 출발하는 신호일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Frantz)>는 이야기 배경과 출발 시점을 알리기 무섭게 둔탁한 종소리와 함께 흑백 영상으로 스크린을 덮는다. 1919년 크베들린부르크. ? ? 전쟁에서 외동아들 프란츠를 잃고 상심에 빠진 독일인 한스 부부. 노령의 그들을 딸이자 며느리처럼 돌보는 안나(폴라 비어)는 프란츠와 약혼한 사이였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꿈과 자존심을 짓이긴 1차 세계대전. 분노와 증오는 한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랑스인은 누구든 아들의 살해범일 따름이다. 파리에서 온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도 모질게 내쫓았다가 프란츠의 친구라는 걸 안 뒤에야 마음을 연다. 아드리앵이 들려주는 비밀스런 시간들이 컬러 영상을 통해 꿈결처럼 몽롱하게 풀린다. 색조만큼 눈길을 끄는 것은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이끈 폴 베를렌 시인이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토탈 이클립스>가 순수와 혼탁, 방탕과 참회를 오간 베를렌의 반생애를 그려냈고, 여기서는 프랑스어의 내밀한 음악성을 가장 잘 살려낸 베를렌의 아름답고 서글픈 서정과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안나가 <가을의 노래>를 콧소리 섞인 프랑스어로 읊거나 앓아누운 자리에서도 베를렌 시집을 품는 장면,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두 남자의 모습 등 흥미로운 대목이 적잖다. ?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노인들이지만, 싸우고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말을 떠올렸을까. 한스는 프랑스인들을 향해 적개심만 키우는 동료들을 나무란다. “우리는 저쪽 아들을 수천 명 죽인 뒤 맥주로 기념했고, 저들은 우리 아들을 수천 명 죽인 뒤 포도주로 기념했소." 동료들은 한스를 비웃으며 군가로 전의를 다진다. “패자가 원한을 버리는 일이 승자의 무장 해제보다 앞서야 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 따위는 씨도 먹히지 않을 터이다. 한스의 등 뒤로 칼 빌헬름의 <라인강을 수호하라>가 울려퍼지면, 안나가 앉은 파리의 식당에서는 노랫말도 살벌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목청을 돋운다. “...저 포악한 병사들이/ 우리 자식들과 아내의 목을 치려 한다 /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을 적실 때까지.” 두 노래는 <카사블랑카>의 ‘카페 아메리캥’에서 국가 대항전처럼 뒤엉켜 흘렀다. 기이한 노래 전투에 당황하면서도 감격하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험프리 보가트의 능청스런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 ? 이 영화에서 컬러는 단순히 회상이나 추억에 머무르지 않는다. 때로는 마음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인다. 친구를 잃은 남자와 연인을 잃은 여자가 만났으니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를 수밖에. 머리에 꽃 그리고 흥겨운 춤판. 하지만 무서운 건 전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독일인들이 퍼붓는 증오와 살의에 질려버린 아드리앵이 몸부림친다. “이런 연극은 그만!” 도대체 어느 무대에서 누가 어떤 역을 맡았다는 말인가. 컬러 화면으로 되돌아보는 1년 전의 격렬한 전투. 섬뜩하도록 충격과 탄식을 안겨준 카메라는 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 다시 말해 보병들의 총검 돌격으로 이뤄진 전쟁이었음을 덤으로 알려준다. 1시간 54분이나 되는 영화가 50분을 넘기기도 전에 천기누설급 정보를 발설하니 후련하기는커녕 조바심이 난다. 정체와 실체를 드러낸 허전함을 요란한 반전으로 채우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바야흐로 연출 역량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 “감독은 언제나 자신이 만든 최신작에 역행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대로 프랑수아 오종은 항상 새로움에 도전했다. <스위밍 풀>, <인 더 하우스>, <영 앤 뷰티풀>, <나의 사적인 여자 친구>에서 욕망과 관능, 섹슈얼리티와 미스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 재능은 ‘예술적 악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약물에 취했던 봉두난발의 사내가 새해맞이 목욕재계를 하고 나선 꼴일까. 청소년관람불가 전문 감독이 12세도 감상할 수 있는 영화를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데, 멜로드라마로 선회한 발길이 가볍지만 경박하지는 않다. 오종 감독의 후끈하고 질펀한 영상에 중독된 관객이라면 뼈마디를 쑤시고 녹이는 충동과 자극을 기대했을 터이다. 동치미를 헹군 듯 싱겁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한 술보다 맑은 물을 더 많이, 더 오래 먹는 법. 연애는 촌스럽고 변태와 외설이 대접받는 시대에서 참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열병을 앓아보는 일도 신선하지 않겠나. ? 아드리앵은 프랑스로 떠나고 더 깊은 시름에 젖는 안나. “삶을 계속 사랑하고 행복하겠다고 약속해줘." 프란츠의 마지막 편지를 떠올리지만 살아갈 희망도 기력도 없다. 베를렌은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운 언덕길 너머에서 기다린다.”고 했지만, 안나에게는 언덕이 아니라 가파르게 깎인 절벽이다. 떠난 이는 함흥차사, 남은 자는 피골상접. 드라마를 축축이 적실 수 있는 조건이다. 시간은 상처를 덧내며 흘러가고, 늦가을 스산한 풍경과 함께 안나가 강물에 잠긴다. “전쟁이 남긴 죽음도 충분해.” 꾸짖는 소리와 무모한 결심은 에두아르 마네의 화폭에 연결된다. 한스 부부는 안나를 파리행 열차에 태운다. 신출내기 척후병처럼 불안한 여행객의 마음을 조명과 음향으로 표현하는 수법이 좋다. 프란츠가 묵었던 호텔의 난잡한 광경이며 오페라 극장과 병원을 거쳐 묘지에 이르는 안나의 행보에 은근슬쩍 트릭을 구사하기도 한다. 안나는 마침내 아드리앵을 만나지만 집안의 공기가 예사롭지 않다. ? ? 승자의 야유가 창이라면 패자의 변명은 나무 방패. 손님들끼리 벌인 식탁 전투에 이어지는 음악회. 드뷔시 가곡 <별이 반짝이는 밤>의 가수와 반주자로 부딪친 두 사람 틈에서 어머니 눈치만 살피는 철부지 사내. 착오인지 착각인지 모를 안타깝고 울화통이 터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덧붙이면 스포일러일 터이니 딱 대사? 한 마디만 올리겠다.?“너무 늦었어요.” 단락마다 <초원의 빛>과 <애수(Waterloo Bridge)>, <마음의 행로>와 <비수(Beloved Infidel)>, <무기여 잘 있거라> 등 할리우드 고전 멜로드라마에 버금가는 정취가 느껴진다. 우리가 잊거나 잃어버린 시간을 흔들어 깨우는 장면들은 신고전주의로 불러도 좋을 만큼 새롭고도 아련하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마네의 유화 <자살(The Suicide)>속 남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치고는 의상과 포즈가 독특하다. 보타이와 핏물이 얼룩진 새하얀 셔츠, 고개를 꺾은 모습은 처연하되 근사한 느낌이어서 ‘슬픈 탄환’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다. 그 남자를 보며 입을 앙다문 안나의 표정이 가장 화사한 색채로 확대된다. ?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출신 폴라 비어는 21세 나이를 잊게 하는 성숙하고 우아한 연기로 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신인에게 주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의 타이틀롤이었던 피에르 니네이의 떨리도록 섬세한 연기는 프랑스 영화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비롯해 차이코프스키의 현악사중주 1번의 <안단테 칸타빌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 등 귀에 익은 클래식 선율도 향수를 자극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 목록에는 돌연변이 영화로 기록되겠지만, 까닭 모를 도발과 전복, 시답잖은 자극을 흥행 요소로 여기는 상황에서 순정과 비련을 선택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슬픔도 고통도 인생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시인의 위로를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다.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포털사이트에 공개된 해외포스터 및 스틸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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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과 관능의 시인을 쫓다, 영화 <네루다>

[칼럼] 야성과 관능의 시인을 쫓다, 영화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1904~ 1973).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가, 외교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네루디스모(nerudismo)’ 시 기법 창시자. 2010년 칠레 북부의 산호세 광산이 무너졌을 때 네루다 문학은 물과 공기에 곁들인 생명줄이었다. 지하 700m에 갇힌 광부 33명은 네루다의 시를 암송하며 생지옥 69일을 이겨냈으니까.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네루다 자서전>에서). 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 지성보다 고통,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시인” 이라 평가했다. 한국 문단에서 네루다 전문가로 통하는 정현종 시인은 “언어라기보다 하나의 생동” 이라며 네루다의 시 한 구절에 감탄한다. “우리는 구름에게, 그 덧없는 풍부함에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 ? 네루다처럼 떠돌이 삶을 이어간 사람도 드물 터이다. 외교관으로 때로는 망명객 신세로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프랑스와 폴란드, 이탈리아와 헝가리, 인도와 중국을 역마살 낀 방랑자처럼 옮겨 다녔다. 마이클 래드포드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가 지중해의 작은 섬 카프리에 머물던 시간을 되돌아본다. 네루다(필립 느와레)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 마리오가 하소연한다.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모든 여자들이, 특히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까지 네루다를 흠모하며 애간장을 태우기 때문이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가슴을 활짝 열고 시의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해.” 바닷가를 거닐다 주변을 둘러보면 메타포가 나타난다며 네루다는 수줍은 노총각에게 시와 사랑의 문을 열어 준다. 마리오를 연기한 마시모 트로이시가 마지막 촬영을 끝내자마자 세상을 떠났다는 뒷얘기도 기억에 남는다. ? <재키>의 감독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한 <네루다(Neruda)>는 <일 포스티노>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네루다를 앞세운다. “칼리굴라 황제님.” “소련이라면 죽고 못 사는 공산주의자.” 정치인들이 떼 지어 야유하자 상원의원 네루다(루이스 그네코)는 단호하게 받아친다. 시인과 공산주의라면 뭔가 어색한 조합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네루다에게 공산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의 현장에서 출발했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내 보잘것없는 시가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시인이 선택한 공산주의는 권력이 아니라 파시즘의 잔혹한 폭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 1948년, 네루다가 선거 참모로 뛰어준 곤잘레스 비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도 파기한다. “우리 대통령의 보스는 미국 대통령이다”는 대사대로 남미에서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이 압력을 넣은 결과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연설로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판한 네루다에겐 면책 특권 박탈과 함께 체포 영장이 떨어진다. 전기영화치고는 출연진이 단출하거니와 두 인물의 대립이 중심축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네루다 추격에 앞장 선 사람은 베테랑 수사 반장 오스카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집요하기로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그림자처럼 쫓는 자베르 경감에 버금간다. 경찰청장과 창녀, 하층민 등 그의 가족 관계도 예사롭지 않다. 중반 이후 갈등하는 오스카 모습엔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서 24시간 눈에 불을 켠 비밀경찰 비즐러가 겹쳐진다. 각을 세운 두 인생이 서로 침투하고 감염되는 과정이 엇비슷한데 종착지는 다르다. ? 이 영화를 두고 ‘역사상 가장 야심적인 스토리텔링’이라는 어느 외국 언론의 평가는 호들갑스럽지만, 이야기를 펼쳐가는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내레이션이 드라마를 운행하는 레일이자 추격자 내면의 격랑으로 쓰인다. <재키>에서 재클린 케네디의 우아하고 친근한 스타일과 이미지를 거의 판박이로 뽑아낸 라라인 감독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까무룩히 넘나든다. 추격전의 큰 틀을 짜되 요란한 액션보다는 서스펜스의 포석을 원용한 플롯을 보여준다. 서스펜스란 관객에게 무언가 명확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믿게 하는 기법으로 호흡은 느린 편이다. 미스터리가 머리로 푸는 게임이라면, 서스펜스는 가슴으로 느끼는 전율이다. 오스카가 네루다의 전처를 유혹하는 대목은 상상일지라도 숨이 막히고, 현재 아내에게 듣는 논픽션과?역할 분담?이야기는 긴장감을 쌓아가는 효과를 얻는다. ? 배반자로 찍힌 처지여도 적보다 친구가 많은 시인. ‘더러운 죄인’으로 네루다를 옭아매려는 권력자들은 비웃음만 산다. 단락마다 네루다 시가 은은한 리듬을 타는데,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는 애창곡처럼 흐른다. “ ...이제 그녀가 곁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를 잃었다는 생각에 잠긴다/ 밤바람은 높은 저곳을 빙빙 돌며 노래한다/ 그 시는 영혼에 떨어진다.” 남미 저항사의 백과사전으로 일컫는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의 “부역자를 처벌하라!”라는 힘찬?후렴구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전달된다. 거리를 헤매는 소녀에게 갓 지은 양복 윗도리를 벗어주거나 취객들에게 조롱당하는 여장남자 가수를 ‘예술 노동자’로 대접하는 모습, 절망한 여성 당원에게 평등의 원리를 설명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등 네루다의 인간 존중과 겸허한 자세는 소박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 네루가가 벌이는 질탕한 유희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술에 젖고 붉은 빛에 감기는 농염한 육체들이어서?훔쳐보다 뺨을 맞은 듯 얼얼하다. 노동자의 고통을 아파하고 가진 자의 착취에 분노하던 네루다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원시림처럼 건강한 욕망을 쏟아낸 격정의 로맨티스트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오, 사랑은 물과 별들 더불어 하는 여행/ 익사하는 공기와 분말의 폭풍 더불어/ 사랑은 번개들의 충돌/ 하나의 꿀에 제압당한 두 몸.” (<100편의 사랑 소네트>에서). 사랑과 혁명, 관능과 야성, 초현실주의와 신비주의 등 '다양성과 상극성의 혼연일치'를 네루다 시의 본질로 파악하는 이유이다. 네루다를 쫓을수록 더 깊이 회의의 늪에 빠져드는 오스카. <이 투 마마>에서 청춘의 들뜸과 설렘을 짓궂도록 온몸으로 묘사해 베니스영화제 신인상을 받았던 가르시아 베르날은 신분과 정체성, 예술과 민중에 대한 고뇌와 매혹, 시샘 등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 게임을 즐기는 도망자와 혼란스런 추격자가 마지막 승부를 벌이는 곳은 아라우카니아 벌판. 19세기 내내 스페인 병사들이 공격했으나 끝내 정복할 수 없었던 땅이다. 칠레의 원주민 마푸체족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현장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교활한 늑대의 울부짖음과 사냥꾼의 으름장, 그리고 넋을 흔들며?이끄는 예술과 생명, 영원의 길. 충직한 수사관 오스카는 네루다를 쫓은 걸까, 아니면 좇은 걸까. 조연?역할이 두드러진 판타지 소설의 낱장을 에필로그처럼 이어붙인 엔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노래하고 사랑하고 투쟁했던 사람, 시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속삭임.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평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파블로 네루다에게는 삶이 바로 시였고, 시가 바로 삶이였다.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 *스틸이미지는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홍보용 자료를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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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리니, 영화 <어느 독재자>

[칼럼] 권력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리니, 영화 <어느 독재자>

<어느 독재자>를 연출한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우리에겐 친숙한 이름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출품은 물론 심사와 교육을 맡은 단골손님이었고, 한용운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 만해대상을 받기도 했으니까. 테헤란 빈민가에서 태어난 마흐말바프의 개인사는 순탄치 않았다. 청소년기부터 반체제 집단에서 저항 의식을 길렀으며, 경찰서를 습격한 죄목으로 5년을 옥살이하다 이란혁명으로 풀려난 뒤에는 문화예술 분야로 눈길을 넓혔다. 페르시아 양탄자에 얽힌 신화를 물레 돌리듯 한 올씩 풀어낸 <가베>는 한국에 첫 선을 보인 그의 영상시였다. 앞 못 보는 10살난 소년을 앞세워 소리로 세상을 응시한 <고요>는 부산영화제의 개막을 알렸고, 아프가니스탄 분쟁 지역에서 체험한 폭압과 고통은 <칸다하르>에 옮겨졌다. 마흐말바프의 가족들도 앞 다퉈 영화를 만든다. <칠판>과 <오후 5시>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두 번이나 따낸 큰딸 사미라를 비롯해 아내와 아들, 막내딸까지 촬영장을 누비고 다닌다. <아빠의 영화학교>는 이들 가족의 연출 활동을 따라잡은 다큐멘터리이다. ? ? 마흐말바프가 발표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란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폭로하고 야유한 것이어서 번번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검열 압박이 계속되고 촬영장의 폭탄 테러 같은 신변 위협이 이어지자 그와 가족들은 유럽을 떠돌다 영국에 망명했다. “내 영화의 리얼리티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찍고 인간의 신음을 담는 마흐말바프의 고백이다. <어느 독재자>의 원제는 <대통령(The President)>이지만, 의역한 우리말 제목이 주제를 두드러지게 한다. ‘독재’라는 단어가 품은 음습한 상황들. 강압과 통제, 선동과 세뇌, 회유와 고문, 흑색선전과 중상모략, 색깔론과 공권력 남용 등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민족과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초법적 월권행위로 영구집권을 꾀하는 게 독재자의 특징이자 목표이다. 조지아(옛 그루지야) 출신 미하일 고미아쉬빌리가 연기하는 이 작품의 독재자도 프롤로그에 본색을 드러낸다. 휘황한 밤거리에 울려 퍼지는 아나운서 목소리. 하해 같은 성은에 백성들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는 용비어천가이다. “모든 불을 꺼라!” 노인과 손자가 한 마디씩 던지자마자 도시는 어둠에 잠긴다. 제 핏줄에게는 자애로운 늙은이지만, 의견이 다른 이들에겐 무자비한 권력자이다. 16살 소년범에게 사형을 집행할 정도니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Tous pour un, un pour tous!).” 파시스트들의 구호처럼 변질된 이 라틴어 격언은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쇼>에서 마을 광장의 조형물에 새겨 매스미디어의 폭력성을 꼬집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필두로 칠레의 피노체트, 리비아의 알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폭정과 학살 만행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은 이들에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패션은 훈장이 주렁주렁한 군복, 취미는 나라 곳곳 구석구석마다 제 사진으로 도배하기, 옵션 품목은 허세의 높이만큼 키운 동상이다. 여기 대통령 할아비의 취향과 스타일도 선배들을 빼닮았다. ? ? 불길한 기운을 느낀 대통령 가족이 해외 탈출을 시도한다. 리무진 안에선 비자금 문제로 난투극을 벌이는 판인데,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답게 왜곡과 날조 보도에 여념이 없다. 도피와 순방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환호하며 대통령을 배웅한다. 무지몽매, 어쩌면 우민화의 덫에 걸린 지도 모를 이 장면은 가상의 나라 이야기로만 비치지 않는다. 불타는 대통령 사진이 암시하는 권력무상, 돌진하는 군중들과 무력으로 진압하는 군인들. 추앙받는 폐하에서 빌어먹을 독재자로 전락한 주인공은 좀도둑질부터 배운다. “우리는 연극을 시작할 거란다.” 아이의 누더기까지 뺏은 독재자는 철부지 손자와 떠돌이 악사 흉내를 내며 줄행랑 길에 오른다. “국민들을 진작 걱정하고 아꼈다면 이렇게는 안 됐을 거예요.” 비렁뱅이의 꼬락서니가 딱해 보인 이발사가 젊잖게 타이르자 독재자는 목에 핏발을 세운다. “네놈들이 나라를 망쳤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뉘우치기는커녕 수치심, 아니 죄 자체를 모르는 죄인을 보는 일은 괴롭다. 최고 권력자에겐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 현상금 걸린 독재자의 도피 행각은 그가 쥐락펴락했던 세상과의 만남이다. 연골이 꺾이도록 돌을 나르는 아이들, 신혼여행을 떠난 신부에게 닥친 참극, 악마적 만행에 침묵하는 구경꾼들, 윤락가 붉은 불빛에 되살아나는 청춘과 광기. 손자의 아스라한 판타지를 곁들인 독재자의 여정은 위태롭고 부아가 치밀고 때론 탄식을 자아낸다. 가발과 넝마, 통기타와 머플러 같은 소품을 적절하게 사용하거나 부감 촬영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수법이 좋다. 마흐말바프 감독은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 극영화가 주는 재미를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도피와 추적이 진땀나게 펼쳐지는 가운데 긴 문장에 쉼표를 찍듯 쉬어가는 대목엔 웃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 예를 들면, 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룬 검문소 다리에서 독재자가 얼떨결에 성직자 포즈를 취하거나 늦가을 벌판에서 허수아비로 인물 풍경화를 완성하는 장면이다. ? ? 오랜 옥고를 치른 정치범들과 독재자의 동행에서는 감독의 신산스런 이력이 읽힌다.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인지 모르고 정겹게 껴안고 가는 길, 장대처럼 솟아 무심히 흔들리는 갈대들, 파스칼을 연상시키는 ‘무력한 정의’에 대한 격렬한 다툼, 흙먼지 강풍에 널뛰는 낡은 옷, 고문으로 망가진 육체여서 기어서라도 확인하고 싶은 사랑,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절망한 얼굴 클로즈업! 짐승의 세월이 남긴 표정이다. 노래인가, 신음인가. 북망산천 찾아가는 상여소리처럼 넋을 흔들고 가슴을 후비는 선율. <노란 손수건>의 참혹한 버전으로 부를 만하다. “만약 국가의 권력 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이끈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저항의 자세를 일러준 작자가 희대의 독재자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메시지가 강한 영화는 결말부에서 전망하고 제시한다. <어느 독재자>도 인권운동가로서 마흐말바프가 성난 군중을 통해 숱한 질문을 던진다. 원한을 되갚는 폭력, 폭력을 부수는 폭력, 피로써 피를 씻어야 끝이 나는가. 모든 걸 야만의 권력과 체제 탓으로 돌릴 것인가. 방관과 침묵으로 폭정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증오만 남은 상황에서 비폭력 혁명이 가능한가. 사죄 없는 용서와 화해는 또 다른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지지 않겠나. 독재자를 단죄했다고 곧바로 평화가 주어지는가. 혼란과 폭력이 꼬리를 물지 않던가. 응징에 앞서 깊이 성찰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나. 어린 손자가 귀를 막는 건 세상 모든 폭거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엔딩에 비친 동작은 짧지만 사흘 낮밤 토론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불행한 사건을 겪었으며, 소중한 선택을 앞에 둔 우리에겐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영화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는 준엄한 명령과 함께. ?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사진은 대표 포털사이트에 업로드된 홍보자료를 사용하였습니다.? ?

  • 작성일 20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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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칼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거창하게 실존주의 철학의 ‘내던져진(Geworfenheit)’ 존재로서 인간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땐 순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천수를 누리거나 시름시름 앓다 가거나 창졸간에 떠나버리거나. 예기치 않은 죽음, 특히 육친과의 황망한 작별은 보낸 이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원망과 그리움, 후회.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가 불러낸 마종기 시인의 <상처4>이다. ? 제목이 멋지다고 파라솔에 킹크랩 한 상이 차려질 듯한 ‘바닷가 맨체스터’ 쯤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놀랍게도 미국 북동부 지방의 실제 지명이니까.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인구 5천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화면엔 싸락눈 날리는 바다와 정박한 배들이 자주 비치니 지명이 풍경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면 풍경은 주인공의 내면 풍랑으로 요동친다. 브로드웨이에서 극작가로 이력을 다진 케네스 로너건의 감독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곁들여 성격이 전혀 다른 남매의 갈등과 화해를 다뤘는데, “고운 색실로 잘 뜨개질한 겨울 스웨터 같은 느낌”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로너건 감독은 이제 가족들의 통증을 엑스레이 사진처럼 들여다보며 주치의로서 처방전을 작성한다. 상처를 보듬을 것인지, 내버려둘 건지, 긁어 덧낼 건지. ? ? ? 바다낚시로 상쾌하게 첫 장면을 열더니 곧바로 우중충해진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 어느 아파트의 잡역부로 막힌 수도관은 시원하게 뚫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체증 걸린 표정에 인사성 없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게 ‘무뚝뚝’ 과 ‘무덤덤’이 삶의 신조라면, 오늘도 어제처럼 ‘그냥저냥 대충대충’은 생활 수칙이다.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리는 맨체스터로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피붙이의 주검 앞에서도 장의사 뺨치도록 무덤덤한 표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혼한 형수는 새살림을 차렸고 장례식은 땅이 녹을 때까지 늦춰진 싱숭생숭한 판에 난데없는 짐까지 떠맡아야 한다.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지정된 리.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처지지만 형의 유언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 삼촌을 '소 닭 보듯' 대하는 고교생 패트릭은 철부지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공부는 일치감치 포기했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어도 눈물은커녕 밴드의 보컬 소녀와 뒹굴고 싶은 궁리만 한다. 또래끼리 결성한 밴드 이름은 스텐토리안(Stentorian), 그리스 신화의 ‘목소리 큰’ 전쟁 영웅 ‘스텐토르’에서 파생된 말로 이들의 연주 실력은 아우성치는 수준에 그친다. 리에겐 철딱서니 없는 조카 녀석도 골치 아프지만 주위 눈길이 심상치 않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아이스하키 코치의 외마디를 떡밥으로 던진 카메라는 플래시백을 미끼로 사용한다. 랜디(미셸 윌리엄스)라는 여성이 나타나면서 무뚝뚝한 사내의 과거와 속내가 조금씩 드러난다. 예전처럼 페이드인, 아웃이나 이중인화 기법으로 차분하게 시공간을 넘나들지 않는다. 회상 장면은 암시나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현재와 뒤섞이니 집중력이 필요하다. ? 요즘 영화는 속임수와 복선, 뒤집기와 깜짝쇼 등 그야말로 스포일러의 지뢰밭이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어서 낮게 포복하는 자세로 헤쳐가야 한다. 리의 기억에 맨체스터는 끔찍한 생지옥으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라는 용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을 베고 살을 찢는 충격이었다. 순식간의 실수, 어떤 부부애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그리고 풍비박산. 리에게 인생이란 죽지 못해 사는 일, 아니 죽기보다 사는 게 두려운 나날이다. 걷는 것인지 떠밀리는 것인지 모를 리의 배회가 쓸쓸하고 춥고 막막하다. 케이시 애플렉은 ‘할리우드의 실력파 멀티 플레이어’ 벤 애플렉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비열한 남자로 잠깐 주목받았을 뿐 대부분 들러리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속담을 비웃으며 남우주연상 트로피 수집에 나선다. ? 지리멸렬과 상투성의 덫에 걸릴 위험이 도사린 소재였다. 하지만 메인 플롯과 곁가지, 1인칭 시점과 3인 시점을 능란하게 배치한 덕분에 러닝타임 137분이 부담스럽지 않다. 무엇보다 절제된 연출과 조화로운 연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철부지의 침대 소동, 얼린 닭과 냉동고에 누운 아빠 등 심심찮게 터지는 유머도 즐겁다. 아픔을 나누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옛 부부의 만남. 눈썰미가 좋다면 명품 유모차 브랜드에서 재혼녀의 살림 형편을 짐작했을 듯싶다. 부부는 갈라서면 남이라지만 랜디의 통절한 고백은 보는 이들의 명치끝을 쑤신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며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나. 녹슨 칼날로 톱밥을 톱질하는 꼴이다. 미셸 윌리엄스가 온몸으로 짜낸 흐느낌은 <밀양>에서 전도연이 토해낸 피울음에 견줄 만하다. ?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랭보 시인의 노래가 일러주듯 인생이란 고난을 통해 깨닫고 성숙하는 과정일 터이다. 하필이면 왜 내가 당해야 하냐고 분노할 일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자신 만의 고난이 있다. 문제는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운명애(Amor Fati)’를 들먹이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투의 어쭙잖은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 치유의 손길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리 챈들러가 쓰러져도 꺾이지 않기를. 인생의 혹한기를 자양분으로 삼기를. 상처가 깊을수록 향이 멀리 퍼지는 소나무처럼 말이다. 리의 마지막 표정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의지가 엿보인다. 좋은 영화는,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그 사람의 삶이 내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각성.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바로 그런 영화이다. ? 글.영화평론가_박평식 ? *영화 홍보용 스틸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 작성일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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