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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대에 할퀸 개인과 가족 /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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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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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남은, 개봉 자체가 기적인 대만 영화. 아시아 영화를 거론할 때 영화 매체와 전문가들이 항상 걸작 목록에 올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A Brighter Summer Day)>이 마침내 극장에 걸린다. 대형 복합상영관들이 낙동강 황소개구리 포식하듯 스크린을 독점하는 현실에서 이런 일은 횡재나 다름없다. 감격에 겨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다. 1991년에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자그마치 236분이며 연출을 맡은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느 수입업자가 관심을 갖겠는가. 아무튼 도난당한 골동품처럼 속을 태우던 영화가 불쑥 나타나 15세이상 관람가로 등급 분류를 마쳤으니 관객들과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고령가란 대만 타이베이의 지역 이름이고 소년은 새파란 열네 살.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Are You Lonesome Tonight?>의 노랫말에서 차용한 영어 제목이 쓸쓸하고 아련하다. “당신의 기억은 어느 눈부신 여름날에 머물러 있나요?” 로큰롤 멜로디는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시대의 공기는 숨통을 죄며 끈끈히 달라붙는다.
 
 

대만에서 최초로 일어난 미성년자의 살인을 소재로 삼은 영화지만, 범죄를 파헤치기보다는 배경과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에 대만 현대사를 알고 감상하는 게 좋다. 유혈 진압으로 3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1947년의 2·28사건, 1949년부터 38년 동안 이어진 세계 최장의 계엄령, 철혈 정치와 총통제. 명나라 시절부터 자리 잡은 ‘본성인’과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외성인’의 대립과 갈등. 격랑의 시대를 헤쳐 온 우리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다.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베이에 수도를 정하고 ‘중화민국’ 정부를 세운 뒤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다. 하지만 정당이나 단체 설립을 허용하지 않는 일당 독재에 우익 세력의 폭력, 이른바 백색 테러가 난무했다. 여기에 평화 회담을 주장하거나 민생 문제 개선이며 민주화를 요구하면 용공 분자로 몰려 곤혹을 치렀다.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영화에 새 물결을 일으킨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슬픈 역사에 깃든 어느 가정의 수난과 몰락을 풍경처럼 묘사한 <비정성시>(1989)로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누군가의 손이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을 켜자마자 그 불빛을 삼키는 시뻘건 화면과 제작사 이름. 첫 장면의 야릇한 기운은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 손전등으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방황과 악몽으로 채워진 청소년기를 떠올린다. “부모 세대는 자식의 안녕을 바랐지만, 학생들은 불안한 미래로 인해 갱단을 조직해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며 생존 의지를 키워나갔다.” 1960년,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타이베이로 이사 온 소년은 장첸이라는 본명보다 2남 3녀 중 넷째라는 뜻에서 샤오쓰로 불린다. 일류 대학에 입학한 큰 딸과 독실한 크리스천 둘째 딸, 어리광을 부리는 막내딸과 다르게 두 아들은 골칫거리인 집안이다. 전당포를 들락거리며 도박 당구에 빠진 큰 녀석이나 시험 성적이 시원찮아 야간 중학교로 떨어진 작은 놈이나 속 썩이는 건 비슷하다. 밤이면 건달들과 어울려 쏘다니기 바쁜 샤오쓰는 또래 소녀 샤오 밍과 사귀는데, 그녀가 도피 중인 폭력단 두목의 연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켕긴다. 집에서는 아직도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존 웨인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고 있으며,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은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한다. 토박이 주민들에게 국민당 정부는 침입자이자 지배자로 군림한다.

 
 

어느 한 장르로 묶기 어려울 만큼 폭과 깊이가 넓고 깊다. 사건 하나로 개인에서 가족과 이웃, 사회와 국가까지 녹여낸 서사 구조는 어지간한 소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탄탄하다. 감독은 기록자의 눈길로 담담하되 끈질기게 샤오쓰와 이웃을 바라본다. 샤오쓰의 풋내 나는 사랑도 흥미롭거니와 둘을 에워싼 이들은 개성도 뚜렷하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여성 가수를 흉내 내는 땅꼬마 켓, 장군 아버지를 둔 데다 칼부림한 경력으로 압도하는 샤오마, 약삭빠르게 상대 폭력단으로 옮겨가는 친구도 있다. 가장 독특한 인물은 소공원파의 큰형님 허니이다. 대만 국가가 나오자 부동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걷는 뱃심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무협 소설로 소개해 동생들을 주눅 들게 하는 카리스마. 그래서 그의 최후는 허망하고 당혹스럽고 조금은 우스꽝스럽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를 캐터필러로 뭉개버리는 탱크 행렬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공기. 혼란과 불안, 단절과 고립, 소외. 공부보다 주먹에 익숙해진 아이들답게 어른들 뺨치는 복수전을 벌인다. 칠흑 같은 어둠과 거센 빗줄기, 섬광처럼 번득이는 동작과 튀는 핏물, 외마디 비명. 세계 범죄영화 항목에 ‘청소년 갱스터 무비’를 추가해도 좋겠다.
 
육체와 정신을 송두리째 짓이기는 권력의 야만성. 회유와 조작, 거짓 자백, 누군가를 엮어야만 내가 풀려난다. 백열등과 얼음덩어리, 텅 빈 공간과 퀭한 눈빛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샤오스의 아버지를 취조하는 사내는 주먹질은커녕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나긋나긋하고 때로는 속삭이듯 심문하더니 쉬는 시간엔 오르간을 연주하며 당나라 시인처럼 흥얼거린다. “창문 밖 비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니/ 오랜 근심과 고뇌가 머릿속에 계속 맴도네./ 꽃거울에 비치는 수척한 얼굴/ 펴지지 않는 주름살.”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떠오른다. 나치 친위대 장교로 집단 학살을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포악하거나 광기를 지닌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가족에겐 자상했으며 모든 면에서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렌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점”에 악의 평범성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평범성, 다시 말해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는 것이다.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 국정농단 조역들의 변명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켰으니 따랐을 뿐이다.” 라는 미련하고 뻔뻔한 진술.
 
교실 밖에선 텁텁한 습기를 내뿜지만 수업 중엔 이따금 웃음이 터진다. 틀린 답안까지 베껴 쓰다 들통 난 학생, <山>과 <Mountain>을 비교하며 한자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교사. 28자밖에 안 되는 알파벳이 수모를 당한다. 로이 오비슨의 <Only The Lonely>를 비롯해 <Why>, <Angel Baby>, <The Magic Moment>등 감미로운 옛 팝송은 분위기 조성에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소년들의 삶을 엮고 인물들의 관계를 잇는 구실을 한다. 극장에서 아이들의 얼굴에 음향으로 처리한 장면은 하워드 혹스 감독의 <리오 브라보> 마지막 총격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두 번에 걸친 자전거 동행은 슬프도록 막막하다. 커닝했다는 누명을 쓴 아들을 아버지가 다독인다. “네 꿈은 네가 만드는 거야. 노력하기에 달렸지.” 두 번째는 실직당한 아버지를 퇴학 맞은 아들이 위로한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말씀 다 기억해요, 그대로 할 게요.” 그들 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영화는 가망이 없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외로움을 달래거나 두려움을 떨쳐내던 샤오쓰의 손전등. 카메라는 촬영장에 되돌아간 손전등을 클로즈업한다. 빛이 꺼졌으니 어둠이 덮칠 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인간과 파렴치한 인간이지.” 라는 대사가 심상치 않다.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소년은 믿었지만 소녀는 믿지 않는다. 곁에서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믿기 어렵다. 변하지 않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과 인간 앞에서 소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에필로그와 엔딩에 담긴 의미는 곱씹어볼 만하다.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엘비스 노래 녹음테이프. 아이들이 선망했던 문화의 무기력한 퇴장이다. 도입부와 똑같이 반복하는 라디오 멘트. 대학 합격자 명단이 줄줄이 흘러나오자 아들의 교복을 빨랫줄에 널려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실린 이름 하나 하나는, 소리굽쇠가 공기를 진동시켜 공명하듯 귓가를 맴돌다 환청으로 감긴다. 난폭한 시대와 희생자를 기억하라, 추모하라, 기억하라. 주인공 샤오쓰와 같은 나이에 샛별로 데뷔한 장첸은 이후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와 <일대종사>,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김기덕 감독의 <숨>에 출연하면서 이력을 쌓았다. 작년 제53회 금마장 영화축제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제작 25주년을 기념해 출연자들이 거의 다 모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기념 영상에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영원성, 좋은 영화는 세월을 이긴다. 좋은 영화는 제작진이 만드는 게 아니라 관객이 만든다.
 
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홍보용 사진을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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