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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을 훔치고 체온을 나누다, 영화 <어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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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18-07-04

  • 조회수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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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하게 바뀐 제목이 또 말썽이다. 원제 <만비키 가족>에서 일본어 만비키(万引)’도둑또는 '도둑질'을 뜻한다. 어감이 마뜩찮거나 흥행에 걸림돌로 점쳐진다면 내용을 헤아려 좀도둑 가족이나 가족 도둑단정도로 옮기면 될 일이었다. 집단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준 명사대신 어렴풋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관형사를 고집한 까닭을 모르겠다. 도둑질 자체를 스포일러라 생각하고 미리 연막을 치는 걸까. 영어 제목도 좀도둑을 가리키는 ‘Shoplifters’를 사용했으니 더욱 아리송할 뿐이다. 요즈음 영화업자들의 등급 하향을 겨냥한 가위질이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노이즈 마케팅, 돌팔이급 작명술은 관객에 대한 무례를 넘어 농락이자 만행이다. 도둑을 도둑이라 부르지 못하는 구경꾼 신세라니. 그런데 분통을 삭이고 헛똑똑이들의 몰상식을 잠깐 눈감아 준다면 영화 <어느 가족>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칸영화제의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모조리 제친 도둑들은 마음까지 훔친다.

 

21세기 일본 영화를 세계무대에 우뚝 세운 주인공이자 가족 영화 전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비정한 사회가 내팽개친 네 남매의 비극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걸어도 걸어도><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 작품 목록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가족은 고레에다 감독에게 오랜 화두였다. 신문 기사 한 줄에서도 소재를 캐내며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그는 가정이란 둥지에서 겪는 갈등과 고통, 상처를 들여다본다. 늘 따뜻한 눈길에 희망을 제시하는 마무리. 일찍이 할리우드는 <패밀리 비즈니스>(1989)에서 세대별 도둑으로 숀 코너리와 더스틴 호프만과 매튜 브로데릭를 내세웠는데, 이제 보니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뛰는 도쿄 패밀리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도쿄 선수들의 실력은 첫 장면부터 출중하다.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슈퍼마켓에서 통신병처럼 신호를 주고 받더니 진열대의 상품들을 쇼핑하듯 익숙하게 훔쳐낸다. 깔끔한 뒤처리에 돌아가는 발걸음도 경쾌한 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린 소녀를 발견한다. 흉터와 야뇨증이 알려주는 학대와 방치. 다섯 살 소녀 쥬리의 절도단 편입은 권유가 아닌 선택이다.

 

난민 수용소와 엇비슷한 다다미방에서 북적대는 좀도둑 일당. 독거노인 행세를 하는 할머니 하츠에 (키키 키린)를 비롯해 아들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며느리 노부요(안도 사쿠라), 손녀 아키(마츠오카 마유)와 막내둥이 쇼타, 그리고 신참 쥬리는 궁핍한 형편에서도 결속력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 아들 부부는 각각 공사판과 세탁 공장에 나가고, 손녀는 숫총각 죽여주는아르바이트를 해도 벌이는 시원찮다. 주요 수입원은 할머니가 받는 연금이지만 2인조 때론 3인조 털이범이 생계를 거든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만 훔치자.”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 걱정하는 꼴이 우습고, 소유권 이전을 선포하는 위용엔 압도를 당한다. 잔기술에 능숙한 원로부터 고강도 스킬을 보유한 중년과 점점 대담해지는 소년, 섬세하고 재빠른 손놀림을 전수받는 신입 등 팀워크는 단단하고 끈끈하다. 그렇다고 범죄를 독려하거나 미화한다고 시비를 걸면 곤란하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혜와 포용력이라는 점에서 구멍가게 할아버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방관하거나 냉담한 기성세대를 에둘러 비판하는지도 모르겠다.

 

3대를 잇는 족보지만 차근차근 뜯어보면 야릇한 구석이 있다. 아들 녀석은 어찌된 일인지 부모를 아빠, 엄마로 부르는 법이 없다. 잠자리를 갖지 않는 건 접어두더라도 부부는 남편과 아내로 보기엔 석연치 않으며, 배 다른 자매라는 처제 또한 수상쩍다. 나들이할 적마다 위자료 명목으로 봉투를 챙겨오는 할머니의 전력도 의심스럽다. 이렇듯 특이한 직업보다 훨씬 특이한 인물 관계가 플롯의 역동성을 높이기 시작한다. 의혹어린 눈초리를 잠시 거둔다면 누구들처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맛 볼 수 있다. 저마다 목을 빼고 감상하는 불꽃놀이, 매미 유충 채집에 나선 정겨운 남매, 바닷가에서 작별을 앞둔 애틋한 미소, 부부의 한낮 정사를 식히는 빗줄기, 거울에 비친 자매의 살가운 포옹 등 단란하고 화목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잡채와 밀개떡을 버무린 전골 요리, 컵라면에 곁들이는 고로케, 삶은 옥수수와 소면 같은 고레에다표 식단은 식구와 밥상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훈훈한 가족 이야기로 내달리던 영화는 스키드 마크를 찍듯 사회성 짙은 스릴러로 뒤튼다.

여린 그는 저항했을까, 투항했을까. 스포일러가 지뢰처럼 깔린 후반부는 자칫 뇌관을 건드릴까 귀띔하기도 쉽지 않다. 꼬이고 감춰진 비밀들이 한 가닥씩 풀리며 냉기서린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쾌감까지 안겨 줄 수 있는 사건과 상황이었다. 카메라를 가정에서 사회로 옮긴 감독은 매섭지만 분노하지 않는다. 독창성에 보편성을 더하고 때론 우아함을 얹은 연출이어서 신파는 얼쩡거릴 틈도 없다. 그동안 고레에다의 배우들 연기는 감정 절제, 문장으로 치면 행간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클로즈업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격렬하게 터뜨린다. 특히 안도 사쿠라가 구사한 다양한 감정 표현은 취조실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렇게 뜨겁도록 서러운 표정을 본 기억이 없다. 전율을 자아내는 72초의 클로즈업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 키키 키린은 여유롭고 넉넉한 자세로 경륜을 보여주고, 릴리 프랭키는 특유의 능청에 진지함을 보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아무도 모른다>로 칸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따낸 고레에다는 이번엔 죠 카이리와 사사키 미유라는 어린 배우들을 기막히게 조련한다.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 문제다, 라는 지적은 옳다. 갈등과 해체, 소외와 방황 등 가족 문제를 한 집안의 골칫거리나 개인에게 맡겨진 고민 정도로 취급하면 안 된다. 사회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로 인식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 거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부족이야.”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절도단 부부가 뇌까리는 외마디가 가슴을 후빈다. 그들은 힘에 부쳤어도 실패하지는 않았다. 아픈 만큼 소중한 기억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극심한 양극화와 헐거워진 사회 안전망을 보며 고레에다 감독의 근심은 깊어가지만 돌아눕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에세이 한 구절을 읽어보자.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굴곡의 인생사에서 관계를 탐구한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영화 세계의 확장이자 가족 영화의 결산으로 평가받아야겠다. 나눌수록 아름답고 풍성해지는 세상을 꿈꾸며.

. 영화평론가_ 박평식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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