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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과 기적을 베푸소서 / 영화 <가버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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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18-12-26

  • 조회수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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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영화 <가버나움(Capernaum)>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놓고 일본 영화 <어느 가족>과 마지막까지 다퉜다. 몇몇 언론은 종려나무 잎사귀를 꽂아주듯 아랍권 식구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는데 결과는 심사위원상에 만족해야 했다. 시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이들 두 가족은 내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분 최종심에서 다시 맞붙을 것으로 점쳐진다.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던 마을로, 신약성서의 사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사람 낚는 어부들’을 거느린 예수가 사역한 본거지이자 숱한 기적을 낳은 무대였으나 7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배덕에서 멸망으로, 라는 예언대로였다. 20세기에 들어 그 옛날 회당 터와 주춧돌 등 유적이 하나씩 드러났고 이제는 성지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폐허만 남은 지역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메인타이틀 아래에 뜬 ‘CHAOS’의 상황은 중반이면 알아차리게 되지만, 제목이 품은 의미를 파악하려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백향목 숲이 울창한 나라이며 산문시 <예언자>로 널리 알려진 칼릴 지브란의 조국 레바논. 하지만 <가버나움> 거리에는 악취가 풍기고 사람들은 지혜의 말씀엔 귀를 닫는다. 레바논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살펴보고 감상해야 할 영화다. 이슬람 국가로 통칭되는 중동 지역 여러 나라와 달리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거의 동등하게 세력을 유지해 왔지만, 종파에 따라 생성된 수십 개 정파에겐 분쟁이 바로 생존이었다. ‘종교 박물관’ 나라다운 복잡한 구성과 갈등은 25년에 걸친 내전에 15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으며 지금은 4명 가운데 1명이 난민이다. 아랍권에선 드물게 비키니 수영복과 음주를 허용하는 나라지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채가 많다. 경제를 살리려 의료용 대마초 합법화를 시도하는 판국인데,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20만 명이 넘는다. 레바논에서는 부모가 승낙하면 9살부터 결혼할 수 있고, 승낙하지 않아도 14살이면 혼인이 가능하다. 세계 영화계를 통틀어도 연기를 겸하는 여성 감독은 흔치 않다. 프랑스의 멜라니 로랑을 제외하면 데뷔작 <카라멜>(2007)부터 <가버나움>까지 각본과 연출과 연기를 도맡은, 레바논 출신 나딘 라바키 감독이 첫 손에 꼽힌다.
 

‘중동의 파리’ 베이루트로 간 카메라는 도심을 벗어나 빈민가에 자리를 잡는다. 수갑이 채워져 법정으로 들어오는 12살 소년 자인 (자인 알 라피아). 칼로 사람을 찔러 5년형을 받고 수감된 처지에 제 부모를 고발했다. 어린 녀석이 소송을 제기한 까닭은 당혹스럽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다. “저를 낳았으니까요.” 자인을 증언대에 앉힌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길고 짧게 5번을 오간다. 아들 나이도 모르는 주제에 부모랍시고 둘러대는 변명은 한심하지만 멱살을 잡을 수 없게 만든다. 불법체류자 신세여서 신분증은 고사하고 출생증명서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을 몇이나 낳은 건지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짐작하기도 어렵다. 일찌감치 감옥에 터를 잡은 큰아들은 쥐어짜는 마약 개발에 여념이 없고, 단칸방에는 보행기에 발목이 묶인 아기를 포함해 여섯 아이가 올망졸망 아니 바글바글 거린다. 어른들이 가르친 거짓말에 능숙해진 아이는 제 몸보다 무거운 가스통을 배달하는 등 앵벌이도 울고 갈 삶을 이악스럽게 버텨낸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전거 도둑>과 <구두닦이>의 소년들이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가족에 견줘도 훨씬 고단하다. 게다가 몇 푼이 아쉬운 부모는 11살짜리 딸을 아저씨뻘 사내에게 팔아넘긴다. 전통과 풍습을 빙자한 매매혼을 감독은 매섭게 비판한다. 파괴와 파탄, 살의를 부르는 만행.
 

떠돌이에게 어울리는 곳은 서커스단.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를 닮은 풍경이 재미있다. 집을 나온 자인은 에티오피아 출신 미혼모를 만나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한다. 가출 소년과 불법체류 여성이라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설정이지만 젖먹이 아기 덕분에 화면은 활기를 띤다. 궁핍해도 상부상조가 즐거운 어느 날, 아기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고 자인의 임무는 보모에서 유모로 바뀐다. 채플린의 따뜻한 팬터마임 <키드> 전반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유모의 나이 때문인지 이쪽 형편이 더 난감하다. 소년에겐 팔자에 없을 육아체험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며 긴장감과 웃음을 준다. “아이와 개는 최고의 연기자”라는 말이 실감나는데, 거리에서 캐스팅한 자인 알 라피아는 연기 유전자를 타고 난 것 같다. 궁하면 통하는 법.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수법들은 아주 기발해 옮기기가 꺼려지지만 한 가지는 밝혀도 좋겠다. 이런 식의 안타깝고 막막한 상황이 이어지면 ‘애늙은이’를 내세우거나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며 닳아빠진 판타지를 우겨넣는 영화가 적잖다. 하지만 나딘 라바키 감독은 몸을 낮추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깨진 거울을 활용해 소년과 아기를 기쁘게 만들고 흐뭇하게 재우는 대목은 탄성이 절로 난다. 소년이 눈물로 끓이는 분유는 어떤 맛일까. 불법 입양과 아동 매매가 판치는 상황이어서 지켜보는 마음은 점점 타들어간다.
 

악전고투 육아일기를 써가던 영화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난민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자칫하면 겉돌거나 삐걱거릴 수 있었으나 이야기는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어쭙잖은 연민보다는 공감과 성찰로 이끄는 연출이 좋다. 때로는 냉정해도 담담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믿음이 간다. 자극적인 영상이나 과장된 문구로 측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이른바 ‘빈곤 포르노’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낳기만 할 뿐 기를 줄을 모르는 어른들. 무능하면 비정하지나 말지. 자인의 호소는 절규에 가깝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어요.”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방치와 학대, 착취가 횡행하는 세상에선 교육은커녕 건강하게 사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아이 마을 전체가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대로 절실한 마음과 사회 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구호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꿈을 키우며 살아야 할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가. 날개를 단 듯 까마득히 올라간 카메라에 빈민촌이 게딱지처럼 잡힌다.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신의 눈으로 지켜본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소외된 이들에게는 더욱 시리고 쓸쓸한 계절이다. 송구영신의 길목에서 <가버나움>은 한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소망한다. “사랑과 은혜와 기적을 베푸소서. 평안한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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