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물등급위원회

  •  
  •  
  •  

시네톡톡

영화관련 외부칼럼을 전해드립니다.

[칼럼] 바보 성자의 간구와 수난 / 영화 <행복한 라짜로>
  • 내용 페이스북에 공유하기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19-06-28

  • 조회수 793

첨부
열리는 장소나 성격에 관계없이 경쟁 영화제는 우열을 다투는 축제여서 뒷말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칸영화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잡다한 시빗거리를 잠재우기에 충분한 결과를 내놓았다. 전율마저 유쾌한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하다는 공감대를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얻어냈으며, 유난히 우수한 작품이 많았던 작년에 이탈리아 영화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 Happy as Lazzaro)>에 안겨준 각본상 또한 썩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수십 년 전 신문에 난 우중충한 기사 몇 줄로 보석처럼 빛나는 각본을 완성했으니까. 침체한 이탈리아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젊은 여성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솜씨다. 배우가 없어도 대사와 음악을 빼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시나리오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대이자 설계도인 시나리오를 잘 쓰는 공식이나 요령이라는 게 따로 있겠나.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면 될 일이다. 성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주인공은 영화에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유럽 젊은이는 이전 순수파처럼 표정은 해맑아도 눈길이 머무는 곳은 전혀 다르다. 행복을 꿈꾸는 걸까. 남들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걸까.
 

이탈리아 두메산골 인비올레타.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처럼 드리운 곳이지만 시대 배경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궁핍한 살림과 고단한 얼굴만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노숙자 합숙소 비슷한 방 몇 개에 54명이 득시글거리고, 밤이면 전등 하나를 차례로 옮겨가며 불을 밝힌다. 농부들은 알폰시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담배 농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지만 빚만 늘어가고 아이들은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부르는데, ‘호출’과 ‘호구’가 이음동의어로 느껴질 지경이다. 농사일을 거드는 건 기본이고 무거운 짐이며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번쩍번쩍 옮길 뿐 아니라 꼬마들과 놀아주거나 커피 배달까지 담당하는 청년 라짜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아무리 궂은 일을 떠맡겨도 눈살 한 번 찌푸린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지능이 낮거나 뇌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겸손하고 잘 생긴 이탈리안 마당쇠. 어느 날 후작 부인이 병약한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를 데리고 마을에 온다. 아들이 휴대 전화를 꺼낼 즈음에야 비로소 세상 풍경이 잡힌다. 농노를 부리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작제가 폐지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후작 부인과 아들의 대화가 섬뜩하다. “저들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깨닫게 되지.” 부인의 말대로 귀족은 농부들을 착취하고 농부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특히 교육과 신앙을 미끼로 던진 후작 부인의 수업이야말로 고도의 세뇌 작전이다. 충직한 라짜로가 마음에 든 탄크레디는 살갑게 굴며 적절히 부려먹는다. 철부지 반항아인지 몽상가인지 종잡을 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꾸민 연극은 마을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온다. 로르와커 감독이 매직 리얼리즘의 붓으로 우화를 새길 화폭을 짜는 시점이다. 내레이션과 다양한 앵글, 역광과 몽환. 전반부를 느슨하게 매듭짓는 이 대목은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딱 한 줄로 정리하겠다. ‘선한 사람 냄새’와 초월적 존재. 휴식 시간에 잠깐 눈을 붙였다 장르가 다른 연주에 깨어나는 느낌일까.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새롭고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 직진한다. 그렇다면 그에겐 ‘등장’이 아니라 ‘강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후작 부인에게 빌붙었던 농장 관리인 니콜라는 늙었지만 착취 수법은 새롭다. 이주노동자들을 밥줄로 농락하는 대목에선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지기보다 “성격은 운명”이라는 옛 철학자의 말을 믿고 싶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를 자처하는 전자 기업이 나라 밖에서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현지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있으니까. 탄크레디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1963)에 나오는 귀족 이름이고, 라짜로는 신약성서의 나사로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는 나사로 둘이 나오는데 한 명은 예수의 눈물어린 기도로 무덤에서 살아났고, 다른 한 명은 거지로 죽어 하늘나라 부자로 영원히 산다. 두 나사로를 합친 듯한 라짜로는 어느 장면에선 예수의 현신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간구.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번영의 도시에서도 여전히 밑바닥을 헤매는 옛 동지들에게 라짜로는 또다시 모든 걸 내준다. 하지만 바보 성자에게 닥치는 배반은 잦고 감사는 짧고 수난은 길다. 소작농 패거리들이 한 끼 포식하려다 낭패를 보는 과정에서 터지는 웃음은 쓰디쓰다 못해 멀미가 날 지경이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다는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그윽한 눈빛은 물이 모래를 적시듯 넓고 깊게 파고든다.
 
 
성당 시퀀스는 127분 러닝타임에서 가장 빛난다. 다시 예수의 채찍질이 필요한 교회. 황홀하게 감겨 스산하게 내려앉는 선율. 얼마나 더 굴러 떨어져야 바닥이 보일까. 막막하고 난감하고 허탈한 시간 그리고 한줄기 눈물의 의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김현승의 시 <눈물>중에서). 하퍼 리 소설로도 유명한 영화 <앵무새 죽이기>(1962)에서 그레고리 펙의 아들에게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단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내세운 영화답게 환상과 환멸을 넘나드는 연출이 좋고, 필름 고유의 질감을 살린 촬영과 디테일 묘사도 돋보인다. 단역들의 조화롭고 자연스런 연기는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이자 자랑이다. 다만 늑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에선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우화에서는 교훈이 두드러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바보. 타인의 아픔을 못 견디는 사람. 끝 모를 사랑과 자비. 거룩한 희생. 그렇다면 당신 영혼의 눈은 열려 있는가. 겉모양으로 판단하고 낮은 소리엔 귀를 닫지 않는가. 선뜻 내주기보다 끝까지 뺏은 적은 없는가. 학대에 길들여지진 않았는가. 선한 이웃으로서 향기를 품고 있는가. 질문은 거세지만 <행복한 라짜로>는 교만하고 이기심에 찌든 마음을 거듭 행궈준다.
 
글. 영화평론가 박평식
 
* 스틸은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홍보용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제2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2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